Text and Context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인간이 농경 사회로 진입하게 되고 과잉 생산되는 물품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물물교환부터 시작하여 화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폐가 그 사람의 부의 척도가 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화폐를 얻기 위해서 광분하기 시작하였고 권력을 가진 사람은 화폐를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며 단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것을 강탈하는 것까지도 불식하면서까지 화폐를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재화의 획득, 그리고 돈의 획득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역사의 현장 가운데 계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 수은에서 말씀하시기를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천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돈의 부족을 겪을 수 있는데 그 때 돈의 유혹을 좇아 돈을 더 잘 벌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멀리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돈이 악은 아니지만 돈은 악으로 향하는 길을 제공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돈의 유혹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바로 자본주의 세상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버립니다. 사람의 목숨까지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으며 사람의 감정은 말할 나위 없으며 사람이 사는 땅은 돈으로 환산되는 것들 중에 일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기에 자신의 지역에 그들이 생각하는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나섭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1-4)
    
그 시설의 주인들이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한 바로 그 땅에 자신들이 원하는 그러나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시설을 짓겠다는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시설이 들어오면 땅값이 떨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대를 합니다. 물론 위해 시설이 들어오면 고민을 할 필요는 있겠지만 장애인 특수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것은 조금은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돈만이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최근에 발달 장애인 하나가 사회복지 시설에서 두살박이 아이를 옥상에서 떨어뜨려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따지면 최근에 물밀듯이 늘어나는 청소년 범죄의 가혹성으로 인해서 학교를 혐오시설로 지정한다든지, 아니면 청소년이 자녀로 있는 사람들을 격리시켜야 한다든지 하는 말들이 있을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약간의 억지를 부려서 말한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부모와 교사들과 같은 어른들이 청소년을 잘 훈육을 한다면 가혹 범죄에 가해자가 되어버린 아이들이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발달장애인들도 같은 예로서 잘 훈육을 하고 그들을 터부시하지 않는다면 그들에 대한 두려움도, 그들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도 많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학교와 같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터부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혐오시설을 들여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도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 나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도 혐오시설로 집값이나 땅값이 떨어질까봐 그리고 장애인들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이 있어서 찬성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낮은 자와, 약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 대해서 나보다 부족한 사람들에 대해서 손을 내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심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간단하게 잊어버리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세속적으로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속물적으로 살아가면서 교회 안에서만 고상한 체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만 하다고 봅니다.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2: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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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6-10)
          
적어도 아브라함 이전의 창세기 역사는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피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취하지 말라고 하였던 선악과를 취하였고 그로 인해서 더 이상 그들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던 과거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졌으며 하나님과 바로 그 전날까지만 해도 함께하였던 그들은 하나님이 나타나자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그들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타나셨고 인간은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거리감을 두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숨어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들이 숨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물음이 자신들이 벗었으므로 숨는다고 인간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에게 벗었다고 누가 알려주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핵심을 찌르십니다. 아담과 하와, 인간 너희들이 나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던 그 선악과를 먹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합리화를 하고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잘못을 떠넘깁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하와가 자신에게 주었기에 먹었다고 했고 하와는 뱀이 꼬여서 먹었다고 말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를 숨겼습니다. 자신이 먹고 싶어서 선악과에 손을 댔다는 그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흙을 먹을 것이라는 징벌을,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의 수고로움을 아담에게는 노동의 수고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죽음을 징벌로 넘겨주십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버렸고 에덴 동산에서 내쫓김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수렵 사회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고 농경 사회로 이행을 강요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그들에게 뼈아팠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라는 것 그것입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1-5)
     
아담의 후예들은 대부분 노아의 홍수 때 모두 쓸려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땅에 죄가 관영함을 보시고 인간과 함께 지상의 모든 것들을 물로 심판하시려고 작정하셨으나 노아와 노아와 함께 있는 존재들은 살리려고 결정하시고 노아에게 산 위에다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셨으며 그 이후에 그 방주는 지상의 모든 것의 구원의 구유가 되어버립니다. 아라랏 산에 멈춰버린 방주 속에서 인간과 지상의 동물들은 다시 나오게 되었고 다시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후예들인 인간은 땅을 돌아다니다가 시날 땅에 멈추게 됩니다. 시날 땅에서 그들은 탑을 지을 것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들이 땅에 탑을 짓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노아의 홍수로 말미암아 인간의 문명이 사라졌음을 알기에 인간의 문명의 사라짐을 막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으로 탑을 짓자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이며 세 번째로는 시날 땅에 국가를 세우고 집단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빠진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하나님을 찾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못했고 하나님께 그들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에 대해서 묻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서 인간이 탑을 짓는 것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시고 판단을 하시며 그에 따른 심판을 선포하시게 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들의 계획이 언어의 혼잡으로 흩어짐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사람을 영위하게 되며 그러한 삶의 영위는 필연적으로 죄와 연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짐이며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인간은 죄를 지을 수록 더욱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조차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간은 그 스스로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것을 합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자신들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의 책략으로 이겨버리기 위해서 그들은 집단이 되었고 국가가 되려고 하였으며 탑을 지어 하나님께 대항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대항을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응징하셨으며 인간이 복구할 수 있는 피해를 인간에게 입히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나타날 때까지 하나님을 피해서 숨을 것인가 혹은 하나님과 대적하여 승리하기를 원할 것인가를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오직 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그리고 항상 끊임없이 물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적발하실 때까지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처벌을 달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나마 살 수 있는 그나마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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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5-8)
        
지난 1년은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뜻깊은 한 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난 몇 년 동안 흔히 503이라고 불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전횡 그리고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가 깊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 아닌 한 개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사람들은 절망했으며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들은 의지를 불태웠고 서로 힘을 모았습니다. 정의는 침묵하지 않는 개인들의 모임으로 인해 다시금 불타오를 수 있다라는 사실을, 세워질 수 있다라는 사실을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한다면 지난 1년 동안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장르 즉 애니메이션이나 슈퍼 히어로 영화 같은 경우는 보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영화관에서보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보는 경우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저는 영화 비평을 하는 영상을 즐겨보고는 합니다. 특히 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을 잘 보는 편인데 어제 이 영화당을 보면서 인상 깊은 말들이 나와서 페이스북에 사진만 올렸습니다. 어제 내용은 혹성탈출 시리즈 리부트 1편 2편과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영화평을 하는 중에 이동진 평론가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게 되는데 유인원에 속한 존재들 속에서도 평화를 원하는 진영, 전쟁을 원하는 진영이 있고 인간에 속한 존재들 속에서도 평화를 원하는 진영, 전쟁을 원하는 진영이 있다. 유인원에 속했는가 인간 속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즉 "어떤 집단에 속했다고 해서 나의 정당성이 그대로 확보되지 않는다. 그 집단에서 어떤 이야기,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정당서을 확보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의 말에는 수긍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필요한 고민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라는 말은 다양한 장르의 컨텐츠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도전되는 말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즉 우리가 하는 일, 하는 행동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먼저 우리가 치열하게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오히려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 비유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라는 명제입니다. 그리고 그 명제 속에서 우리가 유독 고민을 많이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부분은 열매라는 것인데 그 열매가 사랑인가 전도인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더욱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다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양분을 요구합니다. 축복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사역을 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은사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안에 계시는가, 나는 그리스도와 붙어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 확실한가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이 먼저 선행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세상에서 끼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0-34)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 속에서 마찬가지의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의 고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하는 고민은 따로 있다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 위에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순서를 보면 그의 의를 먼저 구하지 않고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먼저 우리는 하나님 나라 자체를 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의 복,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구한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 나라로 번역된 저 말은 하나님 나라라고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영향력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존재들인가,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가, 우리는 변화되어 있는 사람인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물어보신 것입니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영향력 혹은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존재가 당연히 될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누군가의 자녀가 되는 것, 어떤 단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더욱 중요시 여겨야 한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행동으로 자연적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우리에게 한계가 명확하게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14-20)
    
마틴 루터가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말하는 야고보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오히려 우리는 믿음의 위대함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명확하게 그리고 여실히 보여줍니다. 단순히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그들의 열매로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싹을 틔우면 당연히 자라나게 되고 충분히 양분이 공급되면 가지는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열매를 맺고 있다면 우리의 의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문제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하나님께로 매일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남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성령이 없고 우리 안에 단순히 세상의 노력, 의지만 있다면 세상 속에서 의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으며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노력으로 안 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더욱 성령을 사모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해야만 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로 가는,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얻었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시고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싹을 틔웠다라는 것 즉 우리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생명의 유무를 확인하지 않고 부지런히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생명이 없는 종이인형을 억지로 움직이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맛보고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4-2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 다르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가예수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한 사람으로서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악한 일을 행한 사람으로서 심판의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정말로 많습니다. 그것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는 인간의 노력, 인간의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내주하셔야 하며 믿는 모든 사람에게 허락한 생명이 그 인간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가지가 나무에 연결되어 열매를 맺듯, 싹이 틔워서 식물이 되듯 우리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선함을,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유지하고 선언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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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민 33:50-53)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이동하던 바로 그 광야는 척박하기 이를데 없었고 물이 없었으며 파종을 하기 힘든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얻었으며 바위에서 물을 얻었고 메추라기떼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척박한 땅, 아무것도 없다고 한 바로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얻을 수 있었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께서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요단 동편과 서편을 아우르는 그 땅 - 실제로는 요단 동편 땅만을 의미하지만 이스라엘의 거주지가 동편 서편 모두에 퍼져 있게 되었으므로 - 은 비를 머금은 땅이기에 파종할 수 있으며 목축을 하기에도 좋았고 물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물이 없다고, 곡식이 없다고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땅에는 그많은 풍요로움이 있기에 유혹도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까워질 즈음에 브올의 아들 발람의 꾀로 인해서 바알브올을 섬기는 이방 여인들 즉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로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만사천 명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 단 하나였지만 첫 번째 맞이하는이방신의 유혹과 다른 나라 백성들의 접근에 그들은 무방비로 당했고 모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지없이 망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브올의 아들 발람의 유혹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후 행보에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원전 1000년 경 가나안 땅에 머무는 많은 이방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요구하신 이유는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관영하였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멸망받은 것처럼 그들도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 심판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며 그 도구가 이스라엘 백성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브올의 아들 발람의 꾀에 속아서 이방신을 섬겼던 것처럼 그들이 그대로 있으면 그들로 인해서 변질되고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백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상당히 강고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우리는 유혹에 상당히 취약합니다. 믿음이 견고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마저도 한순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그들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타락하게 되며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러한 상황이 우리에게도 그리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있을 수밖에 없음을 하나님은 아십니다.우리에게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풍요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굳이 믿지 않아도 우리는 삶 가운데서 많은 것을 허락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만 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넘어질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때에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은 광야 시대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었을 때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기에 세상의 향락과 유혹에 빠지기가 오히려 덜 쉽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느껴질 때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을 때에 더 많이 갖기 위해서 그리고 가진 것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누리기 위해서 사람은 쉽게 타락하고 쉽게 떠나가버립니다. 아무것도 없었을 때 하나하나를 기도로, 하나님께 구해야만 얻을 수 있었을 때 하지 않았던 행동들을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을 때는 당연하다는듯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우리는 나락으로 빠지게 되고 유혹에 걸려들게 되며 우리 스스로를 우리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하나님과 상관없이 쓰게 되어 결국 멸망받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모세에게 예언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풍요 속에서 그렇게 타락해갈 것임으로 그렇게 망해갈 것임을 예언하셨고 이스라엘은 그대로 변해갔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광야 땅을 그 척박하고 힘든 곳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노정기를 가장 축복받은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다가갔던 때가 없었기에 말입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1: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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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2,13,14)
      
모세도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그가 들어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중보자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의 영화로움을 완벽히 보여주지 못해서입니다. 자신의 혈기를 부리고 자신의 분노를 그들에게 표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그리고 사람 앞에서도 완전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합니다. 단 한순간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실수를 했던 왕자 요나단을 왕 사울은 감싸주지를 못했습니다. 백성이 요나단을 감싸주지 않았다면 왕 사울은 왕자 요나단을 죽여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 지도자라는 것은 그만큼 엄혹한 잣대를 들이밀어야 하는 곳입니다. 모세는 그러한 하나님의 잣대를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다른 모든 20세 이상의 홍해를 건넌 사람과 같이 그도 비스가산에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허락한 시간을 더 이상 늘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하나님께 기도도 올리기 난망합니다. 예레미야는 더 이상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 맞게 기도를 허락하시며 각 사람에 맞게 일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기도를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에스겔에게는 당신 앞을 막아서고,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당신의 진노를 이스라엘 가운데 쏟으셨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지금 모세는 마지막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마지막을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모세에게 허락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말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여정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 또한 모세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그는 차지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즉 요단 동편 땅으로 건너갈 수 있지만 모세에게 허락된 시간은 정해져 있으며 모세에게 허락한 땅은 요단 서편 땅 그리고 비스가산까지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그들이 첫째 달 열다섯째 날에 라암셋을 떠났으니 곧 유월절 다음 날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민 33:1-4)
        
그들의 여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뵈었을 때 그도 하나님을 의심하였고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명령ㅇ르 거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올라서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들은 수많은 착오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엄혹한 하나님의 명령과 불평불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지도자로 설 수 있었고 중보자로 세워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인간의 영웅, 인간의 지도자는 한계가 있습니다. 광야 노정, 40년의 시간 동안 이뤄진 놀라운 능력과 복들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통로를 통해서 이룩하신 모든 것들은 또한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실 것이며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는 사사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이후에는 선지자들, 제사장들 그리고 왕들을 통해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를 사용함에 있어서 힘겨움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십니다.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서 모세만한 사람도 없지만 그리고 모세처럼 그들을 끊임없는 인내로, 하나님 앞에서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을 지킨 사람도 없지만 그도 인간이고 그도 떠나야만 하며 그도 결국은 먼지처럼 사라져야만 합니다. 인간은 덧없습니다. 인간의 대단함, 인간의 명예, 권력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위대하신 분이시고 인간은 목사님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독재자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 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민 2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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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민 32:16-19)
      
지도자의 위치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또한 지도자의 위치에서도 할 수 없는 것 또한 많이 있습니다. 첨예한 문제가 대립되는 경우 그 지도자보다도 더 강맹한 세력들간 사이에서 구도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지도자로서도 할 만은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든 사람들을 제어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환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도자 자신만 긍정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불만인 상황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지도자 휘하 모든 공동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칙 사이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기자 한 귀퉁이가 반기를 듭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의견을 채용하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나갈 수도 있다는 식으로 지도자를 압박합니다. 당연히 공동체의 다른 세력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말을 합니다.
   
지도자가 잠시 그 문제를 방관하게 되면 금세 문제는 확전이 되고 엄청난 갈등이 공동체 내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의견이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정도도 얻지 못하는 것이냐라고 항변을 하고 그 의견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서 공동체를 깨서는 안 된다고 저항을 합니다. 지도자는 이 때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며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자칫 기계적인 중립을 결단으로 내리게 되면 공동체는 백퍼센트 쪼개지게 됩니다.
      
이에 모세가 그들에 대하여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수령들에게 명령하니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각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면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이니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너희와 함께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너희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니라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행할 것이라(민 32:28-4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관리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아니었으며 적은 숫자의 무리들을 제어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모세는 얼마 후면 죽음을 맞이해야만 합니다. 즉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가 연합할 수 있도록 계책을 내는 것인데 일단 모세의 분노를 들은 요단 서편 땅에 거하기를 원하는 지파들이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 제안 자체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 균열이 생겨버린 공동체, 요단 동편 땅으로 가야만 하는 지파들과 요단 서편 땅에 머물기를 원하는 지파들 사이에서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후임이 되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명령 자체가 조금은 이상합니다. 만약 요단 서편 땅에 머물기를 원하는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 땅에서 이뤄질 여호와의 싸움을 완전히 끝날 때까지 함께하지 않으면 그들의 땅을 요단 동편 땅에 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모세가 이러한 명령을 내린 이유는 요단 서편 땅에 거주하는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도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허물을 가진 채로 - 우상을 섬기든, 여호와의 싸움을 포기하든 -  요단 서편 땅에 머물기를 원하게 되면 여호수아서 끝자락에 나온 것처럼  전쟁을 해서라도 이스라엘에 강제로 편입시키라는 것입니다. 즉 땅의 크기가 늘어나고 늘어나지 않는 것보다도 요단 서편 땅에 거주하는 지파들과 요단 동편 땅에 거주하게될 지파들 모두가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단강을 경계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가 되면 그 다음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갈등이 생기고 요단강으로 그들 서로가 경계를 그어버리게 되면 서로가 하나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지게 됩니다. 결국 요단 동편 땅에서 싸우던 요단 서편 땅의 지파들이 갈등이 생겨서 요단 서편 땅으로 가버리게 되면 그들은 아예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떨어져버릴 가능성이 커버립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이스라엘은 갈라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갈등이 생겨서 서로 떨어지게 될 상황이 생겨버리면 요단 서편 땅에 있는 사람들을 힘으로라도 억지로 끌어들여서 요단 동편 땅으로 불러들여 그들도 이스라엘 공동체가 되라고 요구하라는 의도가 담긴 명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 아래서 신정 국가를 이뤄야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시고 그들은 지파 체제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하나되는 공동체 아래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가장 큰 갈등 사항이라 할 수 있는 요단 서편 땅을 원하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의 요구사항을 해결하는 동시에 나머지 지파들의 불만 사항들을 잠재웁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 아래의 하나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결단이 없었다면 요단 동편 땅과 요단 서편 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에도 분명히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에 모세가 그들에 대하여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수령들에게 명령하니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각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면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이니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너희와 함께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너희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니라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행할 것이라 우리가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가나안 땅에 건너가서 요단 이쪽을 우리가 소유할 기업이 되게 하리이다(민 32: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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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민 32:16-19)
        
대가를 치른다라는 것은 이전에 없던 것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 지도자를 세우고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일부 즉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해서 견고한 성읍을 세우고 자신들은 이스라엘의 앞에 서서 그들과 함께 여호와의 전쟁을 싸우기 위해서 전력투구할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의견을 제시할 때에는 그 의견에 맞는 대안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오직 자신들이 편할 수 있는 자리만 선택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눕겠으니 너희들은 알아서하라는 식으로 일들을 처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는데 그러한 일들이 세상 일이면 그들은 세상 속에서 인정받지 못할 것이며 그러한 일들이 여호와의 일들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하게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요.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빼앗으실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에서 한 달란트, 한 므나를 받은 종들이 심판을 당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주인과 맺은 언약을 그들스스로 해석하여 깨뜨려버리고 그에 따른 변명만 늘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과 다르게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언약을 세울 수 있는 중도자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대가를 치르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한 사안들을 이야기합니다.
    
분노를 내뱉었던 모세마저도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사실 그들의 아이들만 그들의 처자들만 아무리 견고한 성읍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놓는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는 조건입니다. 물론 최소한의 병력은 요단 동편 땅에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형제들과의 싸움을 싸우러 대부분 같이 가야하는 상황입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하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차지하고 싶습니다. 요단 동편 땅에서 우리의 처자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요단 서편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정복 작전에 우리도 참여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처자들을 주님께서 보호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그들은 제안과 함께 드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요청을 모세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맹세대로 여호와의 싸움 즉 요단 서편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을 같이 수행하겠다면 그들이 원하는 요단 동편 땅을 그들의 땅으로 주겠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형제가 안식할 때까지 그 싸움을 멈추지 않으면 요단 동편 땅의 안녕은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대가를 치르는 땅인 야셀 땅과 길르앗 땅 즉 요단 동편 땅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대리자인 모세가 처음으로 인증한 것입니다.
      
길르앗과 야셀 땅은 대가를 치르는 땅입니다. 그들이 대가를 치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허락했던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땅은 요단 서편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요단 동편 땅인 길르앗과 야셀 땅은그들이 거주하기에 좋은 땅이었고 그들이 머물기에 멋진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이곳이 좋사오니 이곳을 주옵소서라고 요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싸움을 싸우지 않고 공짜로 땅을 차지하려는 그들에게 진노하셨고 길르앗과 야셀 땅을 차지하려던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캐치하여서 그것을 하겠다라고 그들의 조상들처럼 잘못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과 중보자 모세는 그들에게 길르앗과 야셀 땅, 요단 동편 땅이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음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24-30)
    
하나님은 부지런히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단지 하나님의 자녀로만 인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증인으로 우리를 다시 보내십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속해서 수행해야만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포기하고 내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 길르앗과 야셀 땅을 차지하려고 했던 요단 동편을 얻어냈던 지파들처럼 해야만 합니다.
      


최소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합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은 원래 행해야 하는 일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치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그들의 처자들을 견고한 성읍에 최소한 병력과 함께 놔두고 그들은 요단 서편으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여호와의 정복 전쟁은 그대로 치뤘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는 것은 우리의 최선의 그것보다도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그 시간 때문에 혹은 다양한 이유 때문에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것도 포기함 없이 원하는 것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0: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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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민 32:1-5)
        
이스라엘이 미디안과의 전투로 인해서 최종적으로 요단 동편을 평정해버렸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 땅에서 거처를 정하고 싶어합니다. 과거 광야에 있을 때에는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 그리고 버텨가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지만 결정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목전에 이르러서는 그와 비슷한 땅이라 할 수 있는 그리고 아모리 인들이 이미 텃밭을 가꾸어 충분히 개간된 땅이라 할 수 있는 아모리인들의 땅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이 자리에 멈춰서서 정착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굳이 요단강을 건너서 그곳에서 전쟁을 하기보다는 더 이상 전쟁없이 평온한 삶을 살기를바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타협을 해야만 합니다. 그들의 수장인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빌려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너희는 이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너희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무시하기에는 그와 함께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기 힘들며 모세는 이미 죽음이 예정된 사람이기에 오히려 더 그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는 상태입니다.
        
앞의 목표를 위해서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 그 자체를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로서 함께 걸어가야 하며, 함께 헤치고 가야 하는데 그 공동체가 이뤄놓은 대가를 혼자 모두 차지하겠다고 하는 발상 그 자체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 땅 즉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모리 왕 시혼, 바산 왕 옥, 그리고 미디안의 다섯 왕들을 모두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절멸시켰기 때문입니다.
    


즉 요단 동편 땅에 거처를 정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대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단 서편으로 군대가 같이 가서 대가를 치를 것을 천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치를 대가는 단순히 요단 서편 땅이 안정을 취할 때까지 함께 싸우는 것 이상이 됩니다. 문제는 요단 동편 땅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 아니기에 그 땅은 요단 서편 땅보다도 더 많은 외침을 당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아모리 왕의 땅을 얻기 위해서 암몬 족속은 지속적으로 길르앗 지방을 침공했습니다.
    
요단 서편 땅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그곳 족속들을 완전히 진멸시키지 못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기에 외침을 받았다면 요단 동편 땅은 하나님이 원래 정해주신 땅이 아니다보니 그곳을 넘보기 위해서 이방 족속들이 끊임없이 찾아올 수밖에 없으며 강으로 가로막혀 있기에 요단 서편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그리 친밀하지 못하다는 단점마저 있어서 문제가 터질 때마다 므낫세의 입다처럼 자신들끼리 힘을 만들어서 외세에 대처를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 모두를 하나님은 내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많은 재화들, 많은 이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것이 죄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모든 것들이 온전히 그 사람의 것, 그 단체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포함된 그 어떤 것을 얻게 되었을 때 우리는 대가를 치뤄야만 합니다.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가 모두가 함께 노력해서 얻은 땅을 자신들끼리만 차지하게 되었을 때 신의의 의무를 지기 위해서 자신들도 나머지 이스라엘이 거주할 땅을 온전히 차지하게 하기 위해서 같이 전쟁을 치뤄야 했습니다. 이 부분은 그리 나쁘지 않은 부분입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신의를 지키기만 하면 그만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안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래 허락하신 땅이 아닌 요단 동편 땅에 거주하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것들보다도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더 좋아해서 따라갔으므로 해서 그로 인한 불이익을 대가로 받아야만 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목자들의 문제로 서로 갈라지려 했을 때 롯이 바라본 소돔과 고모라 땅은 하나님의 동산과 같이 양들을 먹이기에 정말로 좋은 땅이었지만 그 땅을 선택하게 됨으로 인해서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암직한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안에 있는 유무형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민 32: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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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다윗이 또 양 떼와 소 떼를 다 되찾았더니 무리가 그 가축들을 앞에 몰고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삼상 30:18-25)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일전을 벌이기 바로 전에 가드왕 아기스의 신하로서 블레셋의 편에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했던 다윗과 그 휘하 부장들은 다른 블레셋 지도자들에 의해서 전쟁에 임하는 것이 좌절됩니다. 바로 전쟁이 있던 그 날 다윗과 그 부하들이 그들의 본거지 성읍인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자신의 성읍이 불타 있으며 그들의 가족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도둑맞았다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허락하셨고 다윗은 그들의 것을 모두 탈취해간 아말렉 족속들을 따라가다가 브솔 시내에서 200명이 낙오되어 그들을 거기에 머무르게 하였고 나머지 400명으로 아말렉 족속을 따라가기에 이르러 그들을 모두 파하고 그들이 가지고 간 모든 것을 다시 돌려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400명과 함께 브솔 시내로 돌아와 그들을 맞이하는 200명의 낙오 병사들을 보게 됩니다.
    
낙오된 이들에게 가족만 돌려보내고 그들을 내쫓자고 말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전리품을 모든 사람에게 공평히 나누는 법을 다윗 시대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미혹케 한 미디안 족속의 다섯 왕을 죽이고 브올의 아들 발람을 죽인 다음 그곳에서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사람들과 가축들 그리고 많은 패물들과 귀금속들을 가지고 오는 그들을 정결하게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모든 전리품의 반을 전쟁을 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눠줘라고 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눠준 이유는 다윗이 낙오한 200명의 군사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준 것과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이 나가든 나가지 않든 모두 하나님의 하나된 백성입니다. 하나된 백성으로서 전쟁 속에서 얻어낸 전리품은 모두 함께 나눠야만 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떠난 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된 이스라엘이라는 기치를 놓치지 않기를 바랐고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전쟁을 나간 사람이나 전쟁을 나가지 않은 사람 모두 전리품을 얻기를 바랐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수령들과 더불어 이 사로잡은 사람들과 짐승들을 계수하고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은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의 일을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곧 이를 그들의 절반에서 가져다가 여호와의 거제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고 또 이스라엘 자손이 받은 절반에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나 각종 짐승 오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막을 맡은 레위인에게 주라(민 31:25-30)
    
여기서 하나더 전쟁에 참여했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가진 전리품 중에 오백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주게 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은 전리품 중에 오십분의 일을 레위인에게 주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에게 전리품을 나눠주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그들에게 양식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 때도 지금도 이러한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그러한 전통이 반 정도만 지켜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지금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담임 목회자나 혹은 일부 부교역자에게는 그들의 양식을 풍성하게 주지만 교회 안에서 일하는 많은 빛을 보지 못하는 담임 목회자나 일부 부교역자를 제외하는 사역자들에게는 제대로 그 처우를 좋게 대우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라는 뜬구름 잡는 식의 위로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그들의 양식을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공금해주라고 다양한 율법을 통해서 명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처우를 해주지 않으면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버려두고 떠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때에 그러한 일들이 있었고 말라기 때에도 마찬가지로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하나는 돈을 잘 버는 사람이든 돈을 잘 못 버는 사람이든 최소한의 살아갈 수 있는 양식이 공급되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사로 싸운 사람이 일만이천 명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최소 육십만, 최대 이백만이었습니다. 이 두 세력에게 반씩 전리품을 나누게 한 것은 이스라엘 군사로 싸운 사람들에게 더 많은 전리품을 주어 그들로 불평하지 않게 하였으며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양식이 될 수 있는 전리품을 주어 최소한의 재화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사장들의 인원이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오백분의 일을 레위인의 인원이 많으므로 그들에게 오십분의 일을 줌으로 해서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급을 받는 존재들임을 다시 한 번 명시하였습니다. 그들이 최소한의 의식주가 채워줘야만이 하나님의 성막 그리고 이후에 하나님의 성전이 버려지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은 손해보지 않겠다라는 결심을 내보이지 말고 교회를 섬기는 담임목회자부터 교역자들 그리고 행정 간사들까지 최소한의 임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느 1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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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다 진영 밖에 나가서 영접하다가 모세가 군대의 지휘관 곧 싸움에서 돌아온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에게 노하니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 31:13-16)
        
이스라엘의 대적 미디안을 징벌하고, 절멸시키고 난 이후에 이스라엘 군사들은 승전보를 울리고 탈취한 것과 노략한 것 모두를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엘르아살이 그들의 탈취물을 보고 기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오히려 이스라엘 군사들이 탈취해온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며 노하였습니다. 모세가 보기에 이스라엘 군사들은 이스라엘 안에 죄악들을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들여오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치라고, 멸망시키라고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 군사들은 모세를 통해서 듣게 된 하나님의 명령의 의도를 명확히 알아야 했고 그 의도대로 행동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한 자신들에게 도취된 체로 그곳에서 탈취할 수 있는 것과, 노략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모두 가지고 왔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한 이후에 그들의 부모에게 찾아가 자랑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책망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 쪽으로 유혹하던 미디안 여인들을 트로피로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24천 명이 죽었다라는 사실을 잊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 군사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지기 이전에 이 문제를 황급히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법궤를 부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치하였던 것처럼 모세는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이스라엘을 우상 쪽으로 미혹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여인들을 죽이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아이들 중 남자들도 모두 죽이고 오직 미혼인 미디안 여성들만 들여오라고 명령을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방식은 이스라엘에게는 고된 아픔이 될 수 있지만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길이었습니다.
    
이후에 사무엘 사울 시대에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모두 죽이고 그 소유를 모두 진멸하라고 하는 하나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같이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좋은 것들은 살려놓고 아각 왕까지 살려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보다 제사를 좋아하지 않으시며 당신의 백성이 치부하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인지라 우리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왜곡되이 해석하고 확대 해석하기도 합니다.
    


사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하나님 말씀의 일부분에 귀를 막고 있는 것 그 자체도 분명한 죄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명령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고 묵상해봐야 합니다. 성경을 띄엄띄엄 읽어서도 안되며 기도를 건성건성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묵상하고 확인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이득을 위해서 함부로 하나님 말씀을 건너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핑계를 대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 핑계를 대고 부모를 섬기지 않았던 유대인 랍비들의 고르반 전통과 일반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스스로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모르기에 결국 그 쪽으로 완전히 빠져버리기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 1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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