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1-3)
       
요나서는 볼 때마다 참 이상한 성경입니다. 요나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요나의 몸으로 그리고 말로 하는 대화를 그대로 풀어쓴 것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하박국서가 오로지 말로 하는 대화로서 예언서의 전부를 만들어내었다면 요나서는 요나와 하나님의 대화를 몸으로 그리고 말로 보여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요나의 행동을 모두 찾아내시며 모두 확인하시고 요나를 끝까지 추적하십니다. 네 그 말대로 정말로 요나를 끝까지 추적하셔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관철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합니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너희들의 죄가 여호와 하나님께 닿았다라고 선언하라고 말입니다.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이유로 그러한 예언을 하라고 하시는지 명확하게 압니다. 그래서 도망칩니다. 애국자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국수주의자인 요나(왕하 14:25-27)는 이스라엘의 대적 앗시리아가 그대로 멸망하기를 바라지 살아남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요나는 앗시리아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평안을 위해서 하나님 앞을 떠납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 가장 밑바닥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를 추적하셔서 요나가 타고 있는 배에 풍랑을 허락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배 안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기도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신들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던 중 배 밑바닥에서 자고 있는 요나를 배의 선장이 찾아냅니다. 그리고 배의 선장은 요나를 다그칩니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욘 1:6)
   
이방인인 선장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보다도 더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배의 주인이자 이방인이며 이교도인 선장의 입을 통해서 요나를 추적하여 다가와서 말을 거십니다.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나에게 구하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재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방인의 입에서 나온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요나는 배 밑바닥까지 쫓아오신 하나님을 보고 결단을 내립니다. 내 나라 이스라엘을 위해서 저 앗시리아가 완전히 멸망하기 위해서 죽겠다고 말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욘 1:9-12)
    
요나는 배 안에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그 제비뽑기에 요나가 당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한 번 요나를 추적하시고 요나에게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애국심에 철철 넘쳐 있던 요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요구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어떻게 하면 풍랑이 멎을 수 있는가 혹은 자신들이 살 수 있는가라는 배 안의 이방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합니다. 자신을 물 속에 빠뜨려라 그러면 나와 상관없는 너희들은 살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사랑하셔서 그에게 복을 주시지만 악인은 미워하셔서 그에게 저주를 허락하시며 죽음을 주신다라고 믿고 있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가 악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실 것이라고 자신을 죽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굳이 그럴 것이면 자신과 상관없는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하나님 앞에 저당잡힐 일이 없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뜻과 상관없이 도망친 자신은 죽게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그 이방인들에게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니느웨로 절대로 갈 일이 없는 요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 위의 사람들에게 전하고 물 속에 빠집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게서 놓임을 받을 것이라고 요나는 생각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욘 1:17)
   
요나서 1장 17절에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요나서 2장 1절에 요나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요나는 72시간을 버티고 나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스올까지 추적하심을 이제는 요나가 깨달았다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그 이후에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해드리기로 합니다. 아무리 자신이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죽으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낯을 피해서 도망가는 당신의 사람들을 찾으시고 추적하시며 그들을 자신의 뜻대로 돌리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존재입니다. 요나는 심정적으로는 앗시리아의 회복을 절대로 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항복 문서를 입으로 하나님께 전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요나를 다시 뭍으로 돌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요나서 1장 1절의 말씀처럼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니느웨로 간 요나는 원래는 하룻동안 돌아다녀야만 다 전할 수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많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달려서 반나절만에 주파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건성으로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를 하였고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니느웨에 심판을 내리기로 한 결정을 철회합니다. 그러한 철회 소식을 당연히 알고 있는 요나는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 4:1-4)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애국자였던 요나는 이스라엘의 대적인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평안을 되찾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을 용서하시고 살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요나는 자신이 죽기를 바랐습니다. 죽여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요나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설득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날이 아주 더운 날 등나무로 그림자를 만들어 요나를 시원케 하신 하나님은 그 밤에 등나무를 벌레로 모두 말라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메마른 동풍을 불게 하셔서 요나를 거의 죽어가게 만들어버립니다. 너무 덥고, 고되었던 요나는 이제는 힘들어서 죽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등나무를 아낀 것처럼 내가 십만이나 되는 니느웨 사람을 아낀 것이 옳지 않은 행사인가라고 말입니다. 요나는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에 침묵으로 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선지자 요나를 죽음으로 징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찾았고 추적하였으며 그를 설득하였습니다. 죽기를 바라는 그를 살리셨고 그에게 계속 자신의 뜻을 따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요청을 말로만 따르고 마음으로 따르지 않았던 요나에게 또 다가오셔서 그를 설득하십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예화를 몸으로 체험하게 하시고 그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키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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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제사년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거기에 기록하라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렘 36:1-4)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가 네리아의 아들 바룩에게 구술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서기관인 네리아의 아들 바룩은 예레미야가 전한 모든 말씀을 당시의 종이라 할 수 있는 두루마리에 모두 필사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앞으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기에 성전에 올라가 바룩에게 자신이 말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신 그 말들을 전하라고 요청합니다.
    
네리아의 아들 바룩은 자신과 예레미야에게 적대적일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에게 내리려고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악과 죄를 용서하시겠다라는 바로 그 말씀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전해졌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이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백성들의 행동들이 지도층에게까지 이어졌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새롭게 부흥을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전심으로 찾고 찾았던 요시아가 바로 느고에 의해서 죽게 되고 그 신복들은 요시아의 아들들 중 하나였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석 달 정도 다스리던 여호아하스는 바로 느고가 잡아서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고 바로 느고는 요시아의 또다른 아들 엘리아김을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고 그를 왕으로 삼습니다. 여호야김은 25세에 왕이 되어 십일 년간 유다 땅을 다스리게 됩니다.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속국으로 만들었을 때에 여호야김은 삼 년 동안 그를 섬기게 되었고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다가 그대로 죽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을 하고 네리아의 아들 바룩이 성전에서 그 예언의 말씀을 선포할 때가 바로 이 때 즈음이었습니다. 즉 여호야김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국가 정세 속에 자신과 유다 왕국을 맡기고 저울질하던 바로 그 때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은 그러한 국가 정세를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그들에게 있던 모든 정치적인, 사회적인, 종교적인 악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도 기득권층은 그것들을 버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득권층이 아닌 사람들마저도 자신들의 위치에 서서 그곳에서도 갑질을 하고 악을 행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강남의 부자들만 사는 동네에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양주라는 서울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면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자신이 갑질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혹은 자신이 서 있는 장소에서 자신이 이득을 취할 수 있기만 하면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어떤 위치에 서 있든간에 그곳에서 악을 행하고 잘못을 행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악을 짓지 않으면 좋겠지만 지었다면 빨리 돌이켜야만 합니다. 회개라는 단어는 뉘우칠 회와 고칠 개가 융합이 된 단어입니다. 즉 뉘우치는 것으로 끝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도록 스스로의 의지를 다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득이 생기기만 하면 아니 습관적으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 대한 행악을 저지르고 있으며 우리 앞에 있는 이득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된 행동으로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여호야김 시대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만 행악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강남에 있는 사람들만 잘못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산에 있는 사람들만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좋겠습니다. 우리도 그 자리에 서 있으면 얼마든지 우리도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며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의지를 불살라야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에게 명령한 대로 하여 여호와의 성전에서 책에 있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니라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의 제오년 구월에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유다 성읍들에서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금식을 선포한지라 바룩이 여호와의 성전 위뜰 곧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새 문 어귀 곁에 있는 사반의 아들 서기관 그마랴의 방에서 그 책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말을 모든 백성에게 낭독하니라(렘 36:8-10)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금식을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선포의 두루마리를 후에 태워버렸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모두 금식을 선포하고 모두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왕이 변하지 않고 결국 세상이 변하지 않게 되자 예루살렘 사람들은 변해버렸습니다. 여호야김 왕의 짧은 치세가 끝이 나고 느부갓네살 왕이 시드기야 왕을 세웠을 때에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도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환경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여겨지자 금식을 선포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변해버렸고 하나님보다는 하늘의 여왕 즉 이집트의 신을 섬기고 가나안의 신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의 순수함을 버리고 정결함을 잊어버렸으며 하나님을 더 이상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셔서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전함을 끝까지 지키지않았습니다.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던 바로 그 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악은 극심했으며 그렇게 힘든 때에도 같은 히브리인들을 종으로 삼는 갑질은 횡횡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평화만 예언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렇게 총체적인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바로 그 때 유다와 예루살렘은 그대로 멸망당하였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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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행 26:1-3)
        
유대교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사울은 예루살렘의 일곱 집사 중 하나였던 그리스도인 스데반의 죽음에 일조를 하였고 그 이후 예루살렘의 거대한 그리스도인 탄압의 기간 때에 가장 선봉에 나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사람들을 잔멸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시리아 땅 다마스커스 즉 다메섹으로 가서 그곳의 유대인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서 그들도 똑같이 징계하기 위해서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가는 길 도중에 즉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인격적으로 강렬하게 사울의 길을 막으셨고 압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광휘에 눈이 멀고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후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야의 기도에 따라서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다메섹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하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이 그를 그의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로 보내었고 그 이후 꽤 오랜 시간 이후에 그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명을 위해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전에도 한 번 언급한 것처럼 사울 즉 사도 바울은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 그 도시의 회당에 먼저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후 이방인에게 갑니다. 꾸준히 말은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전하는 그리스도를 버리면 그들에게 다시는 가지 않겠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지없이 다음 도시 즉 다른 도시로 가게 되면 그곳의 회당을 먼저 찾게 되고 그곳에서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처럼 자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잔멸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하게 하려고 열심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였고 그로 인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6-18)
     
예수님께서는 다메섹에서 기도하는 중에 그에게 이방인들에게만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을 핍박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며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바로 그 유대인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였던 바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다시 불러모으셨던 것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저주하던 베드로를 다시 세우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이스라엘에게도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들에서 지속적으로 게바는 유대인의 사도요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자신의 직임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으니 나도 사랑한다라는 마음으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자신을 핍박하는 그들에게 팔이 꺾일지언정 계속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손을 내밀고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은을 통해서 그리고 수없이 많은 말씀을 통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을 먼저 사랑하지 않고 안아주지 않으면서 다른 그 누군가에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행 28:16-20)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에 죽을 뻔하고 가이사랴에서 자신을 말도 되지 않은 언변으로 감옥에 갇히게 하려고 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결국 로마에 있는 황제에게 항소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배를 타고 가다가 죽을 고비를 겪고 로마에 입성하게 된 바울은 다시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을 청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이 사람들도 바울의 말을 거부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바울은 또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오면 그들에게 다시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도시를 건너 다니면서 전도 여행을 했을 때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유대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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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16-21)
        
데살로니가와 베레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하다가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쫓겨 총 450킬로미터의 거리를 도망쳐온 바울은 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그곳에 우상이 가득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회당과 장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이 다른 도시에서는 일단 회당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먼저 말씀을 전하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에게 갔던 것과는 이번 아테네에서의 그의 행보는 달랐습니다.
    
그의 행보가 이렇게 달랐던 이유는 아테네가 그리스의 주요 도시이면서 수많은 우상으로 가득찬 죄악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우상들 속에서 자신들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자신들이 얼마나 죄악 속에 있는지에 대해서 도시민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그들을 보면서 바울은 거룩한 분노를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그는 당장에 달려가서 회당과 장터에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이방인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논쟁을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를 보면서 아테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재미 있게 바라보았으니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그들은전혀 일할 필요없는 삶을 살아가는 말 그대로 재미를 위해서 유흥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이야기꺼리가 있는가를 탐색하는 아테네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오로지 공감과 재미만을 따지면서 방송이나 영화를 탐닉하는 지금의 세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지금의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생명의 유익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신경쓰기보다는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마저도 교회 안에 뭔가 재미 있는 일들이 있는가 혹은 자신의 욕망, 자신의 이득을 교회 안에서 찾기를 광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미가 없으면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하는 작금의 사람들을 보면 아테네에서 오로지 재미와 유흥을 위해서 하루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전해도 소용이 없고 그냥 신경을 끄는 것이 나을 것도 같은데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 하나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2-25)
        
가진 것이 충분히 많고 이미 풍족해질대로 풍족해 있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우상단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제단은 고대 사람들이 신을 섬기는 방식에서 유래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만신전 즉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이스라엘과 같이 신을 섬기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할만한 신들을 만들어놓고 그들을 필요할 때마다 소환하여 섬깁니다. 비가 필요하면 비의 신을, 돈이 필요하면 돈의 신에게 제물 즉 뇌물을 드려서 자신에게 뭔가 반대급부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전염병이 생기게 되면 혹시 내가 어떤 신에게 저주를 받을만한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알아야 하는데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들 중에서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도시에 닥친 재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알지 못하는 신의 제단에 제물을 드려서 신의 분노를 다스려야 한다라고 고대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고대 사람들의 생각이 그대로 나타났던 것이 바로 요나의 외침에 회개를 한 니느웨 사람들의 금식 기도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금식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도시에 재난이 닥쳤을 때 그 재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요나가 전한 그 신의 분노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무릎을 꿇고 금식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26-31)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단지들 즉 신들은 다 쓸데 없다라고 선언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그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 신에게 제물을 드려 신의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 당신께서 단번에 죽으셨고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셨다라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선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인간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라는 것 그리고 그 죽으심을 박차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는 것 그것 자체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미련한 지식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신들이 있고 그 신들 중에서 자신들이 필요한 신을 선택하여 적절하게 제물을 받치기만 하면 삶을 잘 영위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테네는 상업도시들 중에서도 부자 도시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그 어떤 도시보다도 더 풍족합니다.
    


새로운 신이 필요없으며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을 갈급한 심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재미 있는 이야기 혹은 웃긴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것이 진실이라고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내에서는 마녀사냥이 가득한데 그러한 마녀사냥의 기본적인 전제는 대중은 무조건 옳다라는 신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조건 옳지는 않습니다. 정말 그러한가에 대해서 따졌던 베뢰아 사람들처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우리가 정말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서 충분히 숙고해야만 하는데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다수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지금도 우리 자신이 정말로 옳은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정의를 바라보고 가볍게 공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당연하게 거부하고 기독교 안에만 진리가 있다고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행 178:32-34)
      
복음은 유희의 대상이 아닙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생명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상대가 듣든 듣지 않든 무조건 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말씀을 전하였지만 마음밭이 좋지 않았던 그들은 바울의 입을 통해 전해진 그리스도를 그리고 복음을 거부하였고 바울은 그곳에서 소수의 사람들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절대로 그렇게 해서 얻은 사람들을 소수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풍족해져서 그리고 관심이 없어서 지금의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의 설교를 통해서 제대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열매 없음으로 인해서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의 열매 없음에 낙심하고 고민하는 것은 결국 인간인 우리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열매가 있든지 없든지 오늘도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을 따를 것인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믿는 자들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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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 17:1-3)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번지는 것을 반기지 않습니다. 논쟁이 치열한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에 타협하고 주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수긍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낫다라고 생각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주님의 일에 합력하는 것인데, 주님의 뜻에 맞는 사람과 협력하는 것인데 우리는 세상의 방식으로 합력하고 세상의 이익에 같이 눈이 멀어버립니다. 다툼도 논쟁도 싸움도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어기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매번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그들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논쟁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 보고 믿고 싶은대로 믿는 자칭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말이 틀렸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의 제자들의 육체의 소욕을 좇고 빵만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모습을 경계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라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고 나온 사람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다시금 세상 속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세상 속에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비단 이단의 교리를 가진 사람들뿐만 아닙니다. 넓은 길로 가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증인으로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당신의 뜻대로 세상 속에 나아간 사람들에게 당신의 증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분열을 일으키라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라고 말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행 17:5-9)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으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 된다면 즉 할례를 받고 유대교에 입교하고 유대인으로서 삶을 이어간다면 로마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대제국 로마는 한 국가에 국한된 종교는 핍박을 하지 않습니다. 마치 지금의 중국이 일정 수 이상의 신도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종교라면 터치를 하지 않지만 일정 수 이상의 신도수를 가지고 있으면 엄청난 탄압을 하듯이 대제국 로마 또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을 터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은 아예 믿지 않는 것보다도 더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부분에서는 타협할 생각이 1퍼센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죽음의 위협도 감당하면서 매번 회당에 들어가서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한 자신을 위협하는 도시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를 비난하고 질타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자칭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도시를 건너서 오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피하면서 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그들을 피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 가운데서 그들은 로마에 적대적인 말씀을 퍼트리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사도 바울은 정말로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행 17:10-15)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 거리는 대략 백킬로미터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울에서 천안 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당시 로마 제국은 지금처럼 전화 시설도 없었고 교통 시설도 없었기에 도보로 움직이거나 말을 타야만 했습니다. 그 먼 거리를 움직여서 사도 바울은 다시 베뢰아의 유대인의 회당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자신을 정말로 미워하는,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만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바로 그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바울은 회당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죽을 뻔 합니다. 매번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죽을 뻔 하고 이방인에게 간다고 선언하지만 그러나 다시금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유대인의 회당에 다시 들어갑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서 죽을 뻔하고 가이사랴에서 유대인들에게 계속 고소를 당하여 황제에게 재판해달라고 하기 위해서 가게 된 로마에서도 그는 유대인들을 먼저 찾아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씀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사도 바울은 그들을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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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행 13:1-5)
    
안디옥 교회는 이미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믿는 교회로서는 가장 성공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인원만 많이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어 그 교회 성도들을 섬기는 마음을 가득히 가지고 있는 교회이며 전도단을 세워 다른 도시로 선교 여행을 떠나게 할 수 있는 후원의 마음과 후원의 욕심이 있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에 전도를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명령하셨고 금식하고 기도한 이후에 그 두 사람은 기도의 동역을 받을 것을 확신받고 1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1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 두 사람은 성령의 보내심을 따라서 구브로 즉 키프로스 섬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이후 전도 여행의 패턴은 거의 비슷한데 그들이 어떤 도시든 들어가게 되면 그곳에서 먼저 회당을 찾아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며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그곳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전하든 전하지 않든 간에 그들은 에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전혀 힘쓰는 전도자들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의 파송을 받아 전도하게 된 것은 그들이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그들 이전에도 전도자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 이전에도 교회의 파송을 받았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도자 빌립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로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로 가서 말씀을 전하고 성령의 능력을 행했으며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됨을 알게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여 성령의 일하심을 그곳에서도 나타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마가 요한을 파송한 껀은 성령님께서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사람을 세우라고 명령하셨고 기도로 그들을 파송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마가 요한은 키프로스 섬을 시작으로 하여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들의 복음 전도 사역이 무조건 순풍을 달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일이 엄청난 장애물을 만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키프로스 섬을 횡단하면서 복음 사역에 치중하였으며 그들의 사역은 키프로스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을 만나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행 13:6-10)
      
바예수는 서기오 바울 곁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을 막아서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마술사라는 정체성이 있는데 그는 말씀 사역을 방애하는 외부적인 요인입니다. 주의 사역을 하다보면,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종종 외부적인 요인, 장애물로 인해서 우리가 사역을 하는데 방해를 받으면 우리는 둘 중 하나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 외부 요인을 피해가는 것 혹은 그 외부 요인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복음서에 보면 씨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 비유 중에 가시덤불 속에 빠진 씨앗 비유가 있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보다 주의 사역보다 외부적인 요인 즉 환경적인 요인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유혹에 말씀이 막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외부적인 요인이었던 바예수를 말씀으로 쳐서 물리쳤던 것처럼 우리도 외부적인 요인이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단호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행 13:13, 14)
      
바예수를 물리치고 서기오 바울에게 말씀을 전하는데 성공한 바울과 바나바는 키프로스 섬에 머물지 않고 지중해 북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와중에 수행원이었던 마가 요한은 전도 여행을 중도에 그만두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함께하던 사람이 떠나가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우리의 사역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할 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낙망하게 됩니다. 욥이 가장 힘들 때는 그의 아내가 그를 저주하였을 때이며 또한 그의 친구들이 그를 이해해주지 않을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우리를 핍박할 때보다도 우리를 아는 우리의 가장 친한 사람이 우리에게 발뒤꿈치를 들었을 때, 우리를 이해해주지 않을 때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이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요한의 떠남에도 불구하고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들어가 앉아 말씀을 준비한 것처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의 사역을 그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혹은 같이 사역했던 사람이 멈추자고 하더라도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앉아서 마가 요한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의 나라와 주의 의, 그리고 복음 전도였지 자신을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주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처럼 세상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며 가장 친한 친구의 떠나감보다도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는 우리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장애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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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19-21)
      
사도행전 7장 마지막에 사울이 등장한 뒤에 사도행전의 흐름은 사울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병행하여 처리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는 이야기와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 남방 광야에서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난 이야기를 병치시킨 다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게 예수님을 만남 그리고 아나니야에게 침례를 받고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소로 간 이야기와 베드로의 룻다와 욥바 전도 이야기를 병치시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오로지 사도 베드로와 고넬료 이야기만을 꺼내는데 바로 11장에서는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내에서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갈등이 봉합되는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안디옥 교회가 설립되는 배경을 보여주더니 그곳에 사울이 바나바와 함께 참여하게 되는 사연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후에 나오겠지만 실질적으로 베드로는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죽임을 당하려다가 천사에게 구함을 받고 떠나는 것으로 사도행전에서 주목받을만한 행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 행전과 바울 행전으로 나눠진다라고 내용 분석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실질적으로 7장부터 12장까지가 이들의 교차가 이뤄지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이 주장하고 있는 사도들의 행전이 예수님의 명령이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바로 그 말씀에 부합하도록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선교가 이뤄졌다면 땅끝까지는 바로 바울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2-26)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바울의 선교는 결국 베드로의 고넬료와의 만남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 설득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안디옥 교회에서 헬라인들을 전도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생겼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이들을 추인해줄리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본문 구절을 통해서 사도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역할이 작지 않다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도 결국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것이며 바나바가 바로 그 사울 즉 바울을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온 것이기에 안디옥 교회와 사울의 사도행전 후반의 약진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지를 기반으로 된 것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지는 사도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더 나아가 사도 베드로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환상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렇기에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같은 선상에 서 있는 사도이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을 사도 베드로가 지지해주었다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에게 할례를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있었던 사도 베드로는 사도 바울을 지지하면서 10장에 있었던 환상에 대해서 다시 언급합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과 자신이 그리스도인 됨을 언급하기 위해서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듯이 말입니다. 누가의 사도행전은 이렇듯 전반부에 언급된 사도 베드로의 그림자가 사도 바울의 전도 역사 내내 어느 정도는 짙게 깔려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인 선교를 공식적으로 추인하게 되는 지난 11장 상반부에 이어서 실질적으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중추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게 되고 그 자리에 바나바와 사울이 사역자로서 위치해 있음으로 해서 실질적으로 로마-그리스 문화권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퍼지게 되는 역사를 누가는 밀도 있게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협력으로 -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 이방인 선교의 문이 드디어 열린 것입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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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행 11:1-4)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단박에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할례자들이었습니다. 당연합니다. 당시 이방인들 즉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정말로 드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의 행동은 교회 전체에 비난을 받을만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였고 그로 인해서 비난의 꺼리가 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진해 나갔습니다. 성령께서 인치신 것을 인간이 바꿀 수 없다라는 사실을 그 자신은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고 인간의 율법에 기대어 자신을 비난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거의 그리스도인들의 전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기도 하였지만 베드로 자신도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지 않으시고 성령께서 고넬료와 그 지인들에게 함께하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자신도 그들과 함께 행동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천천히 자신의 행동의 근거를 설명해내기 시작합니다.
    


원래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던 바로 그 때, 수제자였던 바로 그 시절에는 그 누구보다도 괄괄하고 성격이 급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수님한테까지도 성질을 부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된 그, 성령을 받게 된 그, 책임을 가지게 된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그 부주의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질타하는 목소리들의 마음을 이해했고 그들에게도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과 성령의 내리심을 설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 여긴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던 시몬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만으로도 순종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시몬 베드로의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은 행동이었고 그 행동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을 요구하였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전통과 진보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계속 고민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교회에서 드럼을 치는 것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사람들을 비난하기에는 그들의 수가 많습니다.
    
모든 진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듯 모든 전통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막아놓으신 것이 지금은 그러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그것을 다시 풀어놓으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 즉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했다면 스데반의 죽음이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 세계에 진작에 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고정 관념이 그것을 막아섰고 결국 스데반의 죽음과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그 막힌 담을 헐었던 것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6-18)
  
성령께서 베드로를 이끌어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게 하사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그곳에 성령의 임함을 베드로로 하여금 같이 체험하게 하심으로 이방인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열심이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되었고 베드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가 당연하다는듯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추인되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의 마지막 장애물이 허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의외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의 장애물이 우리 자신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아집, 고정관념, 선입견,우리 자신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막히는 것이 느껴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러한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부족한지, 우리가 어디에서 떨어져 있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확인하지 않고 우리 고정 관념대로 하나님의 뜻을 부지불식간에 어기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결국 적폐가 될 수밖에 없고 무너뜨려야 하는 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뜻을 따를 수 있는 단 한 사람,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잘 모르지만 무조건 일단 순종하고 보는 사람들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말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러한 위치에 서 있었다면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어부 출신인 사도 베드로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아직은 이해되지 않지만 주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게 될 때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라고 그들은 고백한 것입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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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침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4-38)
                
우리가 말로는 사랑할 수 있고 말로는 좋아한다 이야기할 수 있으며 말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 혹은 마음에서 우러러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조금은 다른 문제입니다. 베드로도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자신에게 닥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를 이끄시고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주신 이후로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할례받은 동료들과 함께 주님께서 허락하신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우리 스스로 경계를 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사람을 쓰시며 최대한 준비해놓은 사람을 쓰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단련하여 깊이를 신경을 써야 하겠지만 그것과 함께 보폭을 넓게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그 때 베드로처럼 결정적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기를 끊을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신의 정욕부터 마음의 경계까지 복음을 위해서 끊을 줄 알아야 합니다. .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를 눈으로 본 증인입니다. 주님의 증인으로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혹은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쓰시도록 우리 자신을 갈고 닦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우리 자신을 단련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방인은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제된 부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달되도록 하셨고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자 성령께서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 가족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였던 사람들에게 내리셔서 당신께서 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함을 증거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와 동료들 즉 할례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성령의 역사를 목도하였고 성령께서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해서 완벽하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였던 베드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말씀 전파를 시도하였고 성령께서 내리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한 행동이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확신하였으며 이제부터는 정말로 이방인에게 말씀을 전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주님의 지상 명령을 이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실행하는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역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께서 이방인들에게 내리심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침례를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것이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배교의 죄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으나 더 이상 그러한 유대인들의 율법, 유대인들의 한계는 베드로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한 율례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 그리고 마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더 이상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을 매는 속박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스라엘 땅에 속한 사람이든 이방 땅에 속해 있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것임을 확신하고 성령 하나님의 오심을 바랄 수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도 지금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이 그어놓은 경계에 우리 자신이 갇혀 있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어 운동력이 있으며 좌우에 날선 검이 있어 우리 자신의 아집, 우리 자신의 연약함, 우리 자신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 자신이 그러한 하나님을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성령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방인 전도의 역사, 이방인에게 성령이 내리시는 그 모습을 보여주셔서 이방인에게 침례를 줄 수 있도록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당신의 역사를 보여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침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행 10: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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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행 10:26-29)
      
바울은 급진적인 사람입니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으로 있었을 때에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그 스스로 언급하기를 가장 엄한 전통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한 그가 유대교를 믿는 방식은 급진적이면서도 저돌적이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스데반이 죽을 때에 찬성한 사람이며 대제사장의 제가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었으며 다메섹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그리로 몸소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고 명하시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들었을 때에 그는 3년 동안 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에 다메섹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것도 사정을 보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정을 보지 않고 전하며 수많은 토론에서 승리하여 이겼습니다. 그로 인해서 다메섹에서도 죽을 뻔 하였던 그는 예루살렘에서도 죽을 뻔 하여 다소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러한 바울과 다르게 베드로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표적을 보이기도 하고 말씀을 전하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는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합니다. 성전 관리자와 대제사장들이 그와 요한을 불렀을 때에 그는 그리스도인들 앞에 서서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고 죽음을 무릎 씁니다. 분명히 과격하기도 하고 급진적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지도자로서 품격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모두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을 때에도 그는 예루살렘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남아 있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도 말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베드로의 사도행전의 모습은 복음서의 베드로의 모습과 상당히 많이 대조됩니다. 일단 지르고 보는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실 때에 자기도 걷게 해달라고 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라는 예언에 그러지 말라고 예수님께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에 자신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 있고 행동보다도 괄괄한 성미가 더 돋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다릅니다.
      
복음서에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는 사람이었으나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그는 교회가 부르면 가고 그리스도인들 즉 제자들이원하면 찾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면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런데 그는 들나귀처럼 좌충우돌하는 사도 바울과 다르게 좀더 진중합니다. 지도자로서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며 지도자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비록 바울에게 책망을 들었지만 제자들간의 알력들에서 함부로 한 쪽 손을 들어주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뱃사공으로서 선머슴의 모습으로 있었던 예수님이 계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데리고 다니시는 것으로 그와 함께하셨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당시 로마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로서 베드로는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지만 경계를 넘어서며 선을 지나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자신을 믿고 자신을 의지하는 예루살렘 교회와 로마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도 베드로의 직임을 삼위일체 하나님은 알고 계셨기에 그를 차근차근 선을 넘을 수 있는 단계까지 이끌어 주시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사도 베드로가 선을 넘는다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로마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선을 넘는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을 넘는 과정을 상당히 밀도 있게 그려나가십니다. 고넬료에게 임하신 하나님, 사도 베드로에게 임하신 하나님이 로마 세계의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넘는 과정을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 선을 넘을 때까지 긴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당시의 사도 바울 그리고 과거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의 자신처럼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한 번 더 확인을 합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불법임을 알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정하다 하시는 것을 자신이 부정하다 할 수 없어서 왔다고 말하며 왜 자신을 불렀는지에 대해서 한 번 더 확인을 합니다. 확인이 마쳐진 후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즉 복음을 고넬료에게 전했고 그곳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게 되자 그 때에야 비로소 이방인인 고넬료 집안 사람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기로결정을 합니다.
    
지도자가 선을 넘는 것이 힘이 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과정을 묵묵히 가야 하는 이유는 지도자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까지도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사도 베드로 혼자였다면 베드로는 더 많이 질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지도자로서의 품격, 지도자로서의 무게감을 온전히 가지고서 한 걸음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기 이전과 만난 이후로 세상이 변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침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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