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렘 18:18-20)
          
예레미야 18장의 전체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마음이 드시지 않는 당신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토기장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 자신이 지은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토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서버리고 그 흙으로 새로운 토기를 만들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라 일컫는 이스라엘 백성을 흩으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지금 우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없으며 들으려고도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예레미야와같은 당신의 선지자들을 지속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내셔서 그들이 돌이키기를 요청하십니다. 돌이키면 기억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일컫는 이스라엘 백성,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으며 여호와의 명령을 행할 마음이 없는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 심판의 말씀을 말하는 예레미야를 무시하려 하여 그의 말이 아무 가치 없게 하거나 선지자를 해하려고 하는 행동까지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죄악된 백성이며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생명을 위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과거와 다르게 말씀이 이곳 저곳에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TV를 틀어도, 인터넷을 열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토기장이가 자신의 피조물인 토기를 자신의 뜻대로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당신의 피조물에게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요청하고 계시고 있습니다.
      
정해진 때가 올 때까지 그분의 요청이 이어질 것이지만 정해진 때가 지나가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대적으로 인해서 흩어지게 되듯이 지금도 우리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라 일컫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수많은 재화, 자산 속에서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해진 때, 하나님의 요청이 성과없이 끝이 나고 그 이후에 있게 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가 이루어지게 될 때까지 우리는 귀를 막아버리고 행동할 마음을 가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마 23:29-31)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서 근거없는 자신감 즉 근자감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그 어떠한 거리낌도 하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우리는 지금도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말씀만 취사선택하고 우리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말씀만 확인하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다 잘 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육체적인 생명을 빼앗는 것만이 그들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선포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 그 말씀을 아무 가치 없게 만드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육체의 위해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하나님께서 말하라 해서 하게 된 선포의 말씀을 무시하는 전략으로 가치없게 만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악을 하나님께 고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이스라엘 백성이 찾아가서 그 말씀을 달게 들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귀에 달고 단 말씀만 들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쓰디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스스로 겸비하고 한 걸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아뢰고 고치고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가 토기를 보듯이 당신의 피조물이자 당신의 백성인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분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백성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마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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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렘 18:1-4)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의 집으로 가라 명령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게 됩니다. 토기장이는 녹로 위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자신이 원하는대로 토기를 만들고 만약에 자신의 마음에 그 토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토기를 부수고 다시 그 재료인 진흙으로 새로운 토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예레미야가 토기장의의 직무를 살펴보고 있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비유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풀어 말씀하셨던 것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미련하기도 하고 전혀 듣지도 않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쉽게 풀어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토기장이의 일은 그 당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대부분 알고 있었던 삶의 모습이었으며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렘 18:5-10)
      
그들이 알고 있는 토기장이의 직무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하나님이고 그 앞의 토기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죄에서 떠나 그 자신을 하나님 눈에 좋게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토기를 부수겠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토기는 그 만든 존재 토기장이가 주인이기에 토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주인인 토기장이는 그 토기를 부수어버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만든 존재인 하나님이 주인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 이스라엘 백성을 흩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패악과 우상 숭배에 대해서 예레미야 전반부 그리고 후반부 말씀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으며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볼 수가 없었으며 그들을 자신의 것으로 계속 하기가 너무나도 힘이 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를 통해서 토기장이 비유를 베풀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요구하고 계십니다.
          
"내 눈에 싫어버리지 않도록 너의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해라." 여호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모습이 되거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들으며 믿고 싶은대로 믿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면서 토기장이가 토기를 부수어 흙으로 만드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흩으겠다고 하나님께서는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렘 18:11, 12)
      
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죄에서 떠나고 우상 숭배를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지 않는다면 그들을 싫어 버리시겠다고, 흩어버리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11, 12절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진행단계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라는 말은 마치 심판의 나팔이 입에 거의 닿았다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 기로가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에서 지속적으로하나님의 심판만이 전해졌다라고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요청되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 그것도 온몸과 온 맘으로 하는 전심 전신으로 하는 회개를 요구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회개, 돌아오라는 요청은 철저히 거절되었고 거부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그들에게 에정되었던 심판은 결국 실행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심판이 없다라고 이스라엘을 호도하였고 주권자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철저히 심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지, 토기장이가 토기의 주인이듯이 우리의 주인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인지 스스로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한다면, 우리는 고아나 다름이 없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의 구주, 나의 주, 나의 창조자로 고백하고 선포할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하나님의 자녀로 인증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이유는 당신의 자녀이며, 당신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매일 변화되기를 힘쓰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선포를 거부하였고 그들의 죄를 따라가다가 철저히 멸망되었습니다. 토기장이가 자신의 토기를 싫어버려 부수어버리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히 거부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거부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할 하나님의 뜻, 그리스도의 율법을 철저히 지킬 수 있도록 스스로를 깨끗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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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신 27:1-10)
        
40년의 광야 생활 끝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통한의 가데스바네아를 거쳐서 에돔과 모압 땅을 둘러서 가다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치고 그 땅을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기로 확정하고 모압 땅 저편 요단강변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떠나게 되는 모세의 마지막 말들 즉 율법의 유언들을 듣기 위해서 그 자리에 모두 모여 앉아 모세의 강연을 듣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모세는 므리바 물 사건으로 인해서 아론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십 년 동안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며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할 뻔 했던 수 많은 시기 동안 무릎을 꿇으며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강독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된 길을 가면 그들을 징치하기도 하였습니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인생의 채찍과 막대기로 징치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대리자였던 모세는 이스라엘이 멸망당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가르치고 끊임없이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세가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바로 이전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로 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강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십계명부터 시작한 모세의 강독은 들으라 이스라엘이라는 말로 지금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들에게까지 그리고 수많은 디아스포라 유태 민족의 가슴에 박히는 그 율법을 강독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상징이 다윗의 별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나라의 시조가 아브라함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나라의 건국자가 바로 모세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전하라 명령하신 율법의 강독을 거의 마치게 되었을 때 마지막이나 다름이 없는 바로 그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명령을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서 주변의 민족들을 물리치게 되면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서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선포하라고 말입니다.
    
모세가 그 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신 27:11-14)
    
모세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의 입을 빌어서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그 사이에서 가나안 전 지방에 들리도록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라고 복과 저주를 선언하라고 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가나안 민족들 그리고 이방의 모든 민족들에게도 법은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믿는 신 또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신공양을하기도 하고 목석의 신들 즉 죽어 있는 신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정말로 생소한 여호와 하나님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 이방 민족까지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방 민족에게 선포하면서 마찬가지로 선포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음에 새겨야 하기 때문에 선언하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선포하실 때에 에발산에 하나님의 말씀의 석비를 세우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들이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말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눅 12:8-9)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혹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 하나님을 창피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백성에게 선포하라고 하셨던 것처럼 주님을 전하라고 주님의 교회를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나라를 주님을 전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1-17)
    
그리고 또한 우리 자신도 하나님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없을 때에는 주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며 주님께 매달리지만 조금이라도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잊어버려진 하나님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또 자신이 위험하게 되면 다시 하나님을 찾으려고 돌아옵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다시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이웃에게 예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느냐고, 창피해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담대할 수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나님은 내가 높은 부할 때에도 내가 가난할 때에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개인도 부할 때든 가난할 때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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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인간이 농경 사회로 진입하게 되고 과잉 생산되는 물품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물물교환부터 시작하여 화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폐가 그 사람의 부의 척도가 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화폐를 얻기 위해서 광분하기 시작하였고 권력을 가진 사람은 화폐를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며 단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것을 강탈하는 것까지도 불식하면서까지 화폐를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재화의 획득, 그리고 돈의 획득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역사의 현장 가운데 계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 수은에서 말씀하시기를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천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돈의 부족을 겪을 수 있는데 그 때 돈의 유혹을 좇아 돈을 더 잘 벌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멀리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돈이 악은 아니지만 돈은 악으로 향하는 길을 제공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돈의 유혹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바로 자본주의 세상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버립니다. 사람의 목숨까지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으며 사람의 감정은 말할 나위 없으며 사람이 사는 땅은 돈으로 환산되는 것들 중에 일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기에 자신의 지역에 그들이 생각하는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나섭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1-4)
    
그 시설의 주인들이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한 바로 그 땅에 자신들이 원하는 그러나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시설을 짓겠다는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시설이 들어오면 땅값이 떨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대를 합니다. 물론 위해 시설이 들어오면 고민을 할 필요는 있겠지만 장애인 특수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것은 조금은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돈만이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최근에 발달 장애인 하나가 사회복지 시설에서 두살박이 아이를 옥상에서 떨어뜨려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따지면 최근에 물밀듯이 늘어나는 청소년 범죄의 가혹성으로 인해서 학교를 혐오시설로 지정한다든지, 아니면 청소년이 자녀로 있는 사람들을 격리시켜야 한다든지 하는 말들이 있을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약간의 억지를 부려서 말한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부모와 교사들과 같은 어른들이 청소년을 잘 훈육을 한다면 가혹 범죄에 가해자가 되어버린 아이들이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발달장애인들도 같은 예로서 잘 훈육을 하고 그들을 터부시하지 않는다면 그들에 대한 두려움도, 그들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도 많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학교와 같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터부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혐오시설을 들여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도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 나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도 혐오시설로 집값이나 땅값이 떨어질까봐 그리고 장애인들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이 있어서 찬성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낮은 자와, 약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 대해서 나보다 부족한 사람들에 대해서 손을 내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심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간단하게 잊어버리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세속적으로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속물적으로 살아가면서 교회 안에서만 고상한 체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만 하다고 봅니다.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2: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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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6-10)
          
적어도 아브라함 이전의 창세기 역사는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피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취하지 말라고 하였던 선악과를 취하였고 그로 인해서 더 이상 그들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던 과거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졌으며 하나님과 바로 그 전날까지만 해도 함께하였던 그들은 하나님이 나타나자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그들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타나셨고 인간은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거리감을 두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숨어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들이 숨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물음이 자신들이 벗었으므로 숨는다고 인간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에게 벗었다고 누가 알려주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핵심을 찌르십니다. 아담과 하와, 인간 너희들이 나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던 그 선악과를 먹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합리화를 하고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잘못을 떠넘깁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하와가 자신에게 주었기에 먹었다고 했고 하와는 뱀이 꼬여서 먹었다고 말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를 숨겼습니다. 자신이 먹고 싶어서 선악과에 손을 댔다는 그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흙을 먹을 것이라는 징벌을,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의 수고로움을 아담에게는 노동의 수고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죽음을 징벌로 넘겨주십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버렸고 에덴 동산에서 내쫓김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수렵 사회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고 농경 사회로 이행을 강요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그들에게 뼈아팠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라는 것 그것입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1-5)
     
아담의 후예들은 대부분 노아의 홍수 때 모두 쓸려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땅에 죄가 관영함을 보시고 인간과 함께 지상의 모든 것들을 물로 심판하시려고 작정하셨으나 노아와 노아와 함께 있는 존재들은 살리려고 결정하시고 노아에게 산 위에다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셨으며 그 이후에 그 방주는 지상의 모든 것의 구원의 구유가 되어버립니다. 아라랏 산에 멈춰버린 방주 속에서 인간과 지상의 동물들은 다시 나오게 되었고 다시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후예들인 인간은 땅을 돌아다니다가 시날 땅에 멈추게 됩니다. 시날 땅에서 그들은 탑을 지을 것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들이 땅에 탑을 짓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노아의 홍수로 말미암아 인간의 문명이 사라졌음을 알기에 인간의 문명의 사라짐을 막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으로 탑을 짓자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이며 세 번째로는 시날 땅에 국가를 세우고 집단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빠진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하나님을 찾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못했고 하나님께 그들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에 대해서 묻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서 인간이 탑을 짓는 것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시고 판단을 하시며 그에 따른 심판을 선포하시게 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들의 계획이 언어의 혼잡으로 흩어짐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사람을 영위하게 되며 그러한 삶의 영위는 필연적으로 죄와 연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짐이며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인간은 죄를 지을 수록 더욱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조차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간은 그 스스로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것을 합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자신들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의 책략으로 이겨버리기 위해서 그들은 집단이 되었고 국가가 되려고 하였으며 탑을 지어 하나님께 대항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대항을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응징하셨으며 인간이 복구할 수 있는 피해를 인간에게 입히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나타날 때까지 하나님을 피해서 숨을 것인가 혹은 하나님과 대적하여 승리하기를 원할 것인가를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오직 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그리고 항상 끊임없이 물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적발하실 때까지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처벌을 달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나마 살 수 있는 그나마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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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5-8)
        
지난 1년은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뜻깊은 한 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난 몇 년 동안 흔히 503이라고 불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전횡 그리고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가 깊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 아닌 한 개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사람들은 절망했으며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들은 의지를 불태웠고 서로 힘을 모았습니다. 정의는 침묵하지 않는 개인들의 모임으로 인해 다시금 불타오를 수 있다라는 사실을, 세워질 수 있다라는 사실을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한다면 지난 1년 동안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장르 즉 애니메이션이나 슈퍼 히어로 영화 같은 경우는 보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영화관에서보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보는 경우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저는 영화 비평을 하는 영상을 즐겨보고는 합니다. 특히 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을 잘 보는 편인데 어제 이 영화당을 보면서 인상 깊은 말들이 나와서 페이스북에 사진만 올렸습니다. 어제 내용은 혹성탈출 시리즈 리부트 1편 2편과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영화평을 하는 중에 이동진 평론가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게 되는데 유인원에 속한 존재들 속에서도 평화를 원하는 진영, 전쟁을 원하는 진영이 있고 인간에 속한 존재들 속에서도 평화를 원하는 진영, 전쟁을 원하는 진영이 있다. 유인원에 속했는가 인간 속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즉 "어떤 집단에 속했다고 해서 나의 정당성이 그대로 확보되지 않는다. 그 집단에서 어떤 이야기,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정당서을 확보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의 말에는 수긍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필요한 고민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라는 말은 다양한 장르의 컨텐츠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도전되는 말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즉 우리가 하는 일, 하는 행동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먼저 우리가 치열하게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오히려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 비유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라는 명제입니다. 그리고 그 명제 속에서 우리가 유독 고민을 많이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부분은 열매라는 것인데 그 열매가 사랑인가 전도인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더욱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다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양분을 요구합니다. 축복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사역을 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은사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안에 계시는가, 나는 그리스도와 붙어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 확실한가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이 먼저 선행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세상에서 끼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0-34)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 속에서 마찬가지의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의 고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하는 고민은 따로 있다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 위에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순서를 보면 그의 의를 먼저 구하지 않고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먼저 우리는 하나님 나라 자체를 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의 복,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구한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 나라로 번역된 저 말은 하나님 나라라고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영향력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존재들인가,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가, 우리는 변화되어 있는 사람인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물어보신 것입니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영향력 혹은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존재가 당연히 될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누군가의 자녀가 되는 것, 어떤 단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더욱 중요시 여겨야 한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행동으로 자연적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우리에게 한계가 명확하게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14-20)
    
마틴 루터가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말하는 야고보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오히려 우리는 믿음의 위대함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명확하게 그리고 여실히 보여줍니다. 단순히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그들의 열매로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싹을 틔우면 당연히 자라나게 되고 충분히 양분이 공급되면 가지는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열매를 맺고 있다면 우리의 의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문제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하나님께로 매일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남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성령이 없고 우리 안에 단순히 세상의 노력, 의지만 있다면 세상 속에서 의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으며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노력으로 안 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더욱 성령을 사모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해야만 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로 가는,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얻었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시고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싹을 틔웠다라는 것 즉 우리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생명의 유무를 확인하지 않고 부지런히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생명이 없는 종이인형을 억지로 움직이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맛보고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4-2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 다르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가예수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한 사람으로서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악한 일을 행한 사람으로서 심판의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정말로 많습니다. 그것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는 인간의 노력, 인간의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내주하셔야 하며 믿는 모든 사람에게 허락한 생명이 그 인간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가지가 나무에 연결되어 열매를 맺듯, 싹이 틔워서 식물이 되듯 우리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선함을,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유지하고 선언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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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민 33:50-53)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이동하던 바로 그 광야는 척박하기 이를데 없었고 물이 없었으며 파종을 하기 힘든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얻었으며 바위에서 물을 얻었고 메추라기떼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척박한 땅, 아무것도 없다고 한 바로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얻을 수 있었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께서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요단 동편과 서편을 아우르는 그 땅 - 실제로는 요단 동편 땅만을 의미하지만 이스라엘의 거주지가 동편 서편 모두에 퍼져 있게 되었으므로 - 은 비를 머금은 땅이기에 파종할 수 있으며 목축을 하기에도 좋았고 물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물이 없다고, 곡식이 없다고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땅에는 그많은 풍요로움이 있기에 유혹도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까워질 즈음에 브올의 아들 발람의 꾀로 인해서 바알브올을 섬기는 이방 여인들 즉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로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만사천 명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 단 하나였지만 첫 번째 맞이하는이방신의 유혹과 다른 나라 백성들의 접근에 그들은 무방비로 당했고 모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지없이 망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브올의 아들 발람의 유혹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후 행보에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원전 1000년 경 가나안 땅에 머무는 많은 이방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요구하신 이유는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관영하였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멸망받은 것처럼 그들도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 심판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며 그 도구가 이스라엘 백성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브올의 아들 발람의 꾀에 속아서 이방신을 섬겼던 것처럼 그들이 그대로 있으면 그들로 인해서 변질되고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백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상당히 강고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우리는 유혹에 상당히 취약합니다. 믿음이 견고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마저도 한순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그들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타락하게 되며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러한 상황이 우리에게도 그리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있을 수밖에 없음을 하나님은 아십니다.우리에게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풍요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굳이 믿지 않아도 우리는 삶 가운데서 많은 것을 허락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만 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넘어질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때에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은 광야 시대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었을 때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기에 세상의 향락과 유혹에 빠지기가 오히려 덜 쉽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느껴질 때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을 때에 더 많이 갖기 위해서 그리고 가진 것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누리기 위해서 사람은 쉽게 타락하고 쉽게 떠나가버립니다. 아무것도 없었을 때 하나하나를 기도로, 하나님께 구해야만 얻을 수 있었을 때 하지 않았던 행동들을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을 때는 당연하다는듯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우리는 나락으로 빠지게 되고 유혹에 걸려들게 되며 우리 스스로를 우리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하나님과 상관없이 쓰게 되어 결국 멸망받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모세에게 예언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풍요 속에서 그렇게 타락해갈 것임으로 그렇게 망해갈 것임을 예언하셨고 이스라엘은 그대로 변해갔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광야 땅을 그 척박하고 힘든 곳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노정기를 가장 축복받은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다가갔던 때가 없었기에 말입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1: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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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2,13,14)
      
모세도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그가 들어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중보자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의 영화로움을 완벽히 보여주지 못해서입니다. 자신의 혈기를 부리고 자신의 분노를 그들에게 표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그리고 사람 앞에서도 완전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합니다. 단 한순간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실수를 했던 왕자 요나단을 왕 사울은 감싸주지를 못했습니다. 백성이 요나단을 감싸주지 않았다면 왕 사울은 왕자 요나단을 죽여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 지도자라는 것은 그만큼 엄혹한 잣대를 들이밀어야 하는 곳입니다. 모세는 그러한 하나님의 잣대를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다른 모든 20세 이상의 홍해를 건넌 사람과 같이 그도 비스가산에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허락한 시간을 더 이상 늘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하나님께 기도도 올리기 난망합니다. 예레미야는 더 이상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 맞게 기도를 허락하시며 각 사람에 맞게 일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기도를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에스겔에게는 당신 앞을 막아서고,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당신의 진노를 이스라엘 가운데 쏟으셨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지금 모세는 마지막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마지막을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모세에게 허락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말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여정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 또한 모세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그는 차지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즉 요단 동편 땅으로 건너갈 수 있지만 모세에게 허락된 시간은 정해져 있으며 모세에게 허락한 땅은 요단 서편 땅 그리고 비스가산까지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그들이 첫째 달 열다섯째 날에 라암셋을 떠났으니 곧 유월절 다음 날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민 33:1-4)
        
그들의 여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뵈었을 때 그도 하나님을 의심하였고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명령ㅇ르 거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올라서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들은 수많은 착오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엄혹한 하나님의 명령과 불평불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지도자로 설 수 있었고 중보자로 세워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인간의 영웅, 인간의 지도자는 한계가 있습니다. 광야 노정, 40년의 시간 동안 이뤄진 놀라운 능력과 복들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통로를 통해서 이룩하신 모든 것들은 또한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실 것이며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는 사사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이후에는 선지자들, 제사장들 그리고 왕들을 통해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를 사용함에 있어서 힘겨움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십니다.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서 모세만한 사람도 없지만 그리고 모세처럼 그들을 끊임없는 인내로, 하나님 앞에서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을 지킨 사람도 없지만 그도 인간이고 그도 떠나야만 하며 그도 결국은 먼지처럼 사라져야만 합니다. 인간은 덧없습니다. 인간의 대단함, 인간의 명예, 권력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위대하신 분이시고 인간은 목사님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독재자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 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민 2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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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민 32:16-19)
      
지도자의 위치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또한 지도자의 위치에서도 할 수 없는 것 또한 많이 있습니다. 첨예한 문제가 대립되는 경우 그 지도자보다도 더 강맹한 세력들간 사이에서 구도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지도자로서도 할 만은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든 사람들을 제어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환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도자 자신만 긍정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불만인 상황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지도자 휘하 모든 공동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칙 사이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기자 한 귀퉁이가 반기를 듭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의견을 채용하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나갈 수도 있다는 식으로 지도자를 압박합니다. 당연히 공동체의 다른 세력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말을 합니다.
   
지도자가 잠시 그 문제를 방관하게 되면 금세 문제는 확전이 되고 엄청난 갈등이 공동체 내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의견이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정도도 얻지 못하는 것이냐라고 항변을 하고 그 의견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서 공동체를 깨서는 안 된다고 저항을 합니다. 지도자는 이 때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며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자칫 기계적인 중립을 결단으로 내리게 되면 공동체는 백퍼센트 쪼개지게 됩니다.
      
이에 모세가 그들에 대하여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수령들에게 명령하니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각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면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이니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너희와 함께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너희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니라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행할 것이라(민 32:28-4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관리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아니었으며 적은 숫자의 무리들을 제어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모세는 얼마 후면 죽음을 맞이해야만 합니다. 즉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가 연합할 수 있도록 계책을 내는 것인데 일단 모세의 분노를 들은 요단 서편 땅에 거하기를 원하는 지파들이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 제안 자체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 균열이 생겨버린 공동체, 요단 동편 땅으로 가야만 하는 지파들과 요단 서편 땅에 머물기를 원하는 지파들 사이에서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후임이 되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명령 자체가 조금은 이상합니다. 만약 요단 서편 땅에 머물기를 원하는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 땅에서 이뤄질 여호와의 싸움을 완전히 끝날 때까지 함께하지 않으면 그들의 땅을 요단 동편 땅에 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모세가 이러한 명령을 내린 이유는 요단 서편 땅에 거주하는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도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허물을 가진 채로 - 우상을 섬기든, 여호와의 싸움을 포기하든 -  요단 서편 땅에 머물기를 원하게 되면 여호수아서 끝자락에 나온 것처럼  전쟁을 해서라도 이스라엘에 강제로 편입시키라는 것입니다. 즉 땅의 크기가 늘어나고 늘어나지 않는 것보다도 요단 서편 땅에 거주하는 지파들과 요단 동편 땅에 거주하게될 지파들 모두가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단강을 경계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가 되면 그 다음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갈등이 생기고 요단강으로 그들 서로가 경계를 그어버리게 되면 서로가 하나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지게 됩니다. 결국 요단 동편 땅에서 싸우던 요단 서편 땅의 지파들이 갈등이 생겨서 요단 서편 땅으로 가버리게 되면 그들은 아예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떨어져버릴 가능성이 커버립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이스라엘은 갈라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갈등이 생겨서 서로 떨어지게 될 상황이 생겨버리면 요단 서편 땅에 있는 사람들을 힘으로라도 억지로 끌어들여서 요단 동편 땅으로 불러들여 그들도 이스라엘 공동체가 되라고 요구하라는 의도가 담긴 명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 아래서 신정 국가를 이뤄야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시고 그들은 지파 체제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하나되는 공동체 아래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가장 큰 갈등 사항이라 할 수 있는 요단 서편 땅을 원하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의 요구사항을 해결하는 동시에 나머지 지파들의 불만 사항들을 잠재웁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 아래의 하나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결단이 없었다면 요단 동편 땅과 요단 서편 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에도 분명히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에 모세가 그들에 대하여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수령들에게 명령하니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각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면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이니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너희와 함께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너희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니라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행할 것이라 우리가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가나안 땅에 건너가서 요단 이쪽을 우리가 소유할 기업이 되게 하리이다(민 32: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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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민 32:16-19)
        
대가를 치른다라는 것은 이전에 없던 것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 지도자를 세우고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일부 즉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해서 견고한 성읍을 세우고 자신들은 이스라엘의 앞에 서서 그들과 함께 여호와의 전쟁을 싸우기 위해서 전력투구할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의견을 제시할 때에는 그 의견에 맞는 대안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오직 자신들이 편할 수 있는 자리만 선택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눕겠으니 너희들은 알아서하라는 식으로 일들을 처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는데 그러한 일들이 세상 일이면 그들은 세상 속에서 인정받지 못할 것이며 그러한 일들이 여호와의 일들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하게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요.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빼앗으실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에서 한 달란트, 한 므나를 받은 종들이 심판을 당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주인과 맺은 언약을 그들스스로 해석하여 깨뜨려버리고 그에 따른 변명만 늘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과 다르게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언약을 세울 수 있는 중도자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대가를 치르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한 사안들을 이야기합니다.
    
분노를 내뱉었던 모세마저도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사실 그들의 아이들만 그들의 처자들만 아무리 견고한 성읍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놓는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는 조건입니다. 물론 최소한의 병력은 요단 동편 땅에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형제들과의 싸움을 싸우러 대부분 같이 가야하는 상황입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하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차지하고 싶습니다. 요단 동편 땅에서 우리의 처자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요단 서편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정복 작전에 우리도 참여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처자들을 주님께서 보호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그들은 제안과 함께 드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요청을 모세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맹세대로 여호와의 싸움 즉 요단 서편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을 같이 수행하겠다면 그들이 원하는 요단 동편 땅을 그들의 땅으로 주겠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형제가 안식할 때까지 그 싸움을 멈추지 않으면 요단 동편 땅의 안녕은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대가를 치르는 땅인 야셀 땅과 길르앗 땅 즉 요단 동편 땅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대리자인 모세가 처음으로 인증한 것입니다.
      
길르앗과 야셀 땅은 대가를 치르는 땅입니다. 그들이 대가를 치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허락했던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땅은 요단 서편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요단 동편 땅인 길르앗과 야셀 땅은그들이 거주하기에 좋은 땅이었고 그들이 머물기에 멋진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이곳이 좋사오니 이곳을 주옵소서라고 요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싸움을 싸우지 않고 공짜로 땅을 차지하려는 그들에게 진노하셨고 길르앗과 야셀 땅을 차지하려던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캐치하여서 그것을 하겠다라고 그들의 조상들처럼 잘못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과 중보자 모세는 그들에게 길르앗과 야셀 땅, 요단 동편 땅이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음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24-30)
    
하나님은 부지런히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단지 하나님의 자녀로만 인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증인으로 우리를 다시 보내십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속해서 수행해야만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포기하고 내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 길르앗과 야셀 땅을 차지하려고 했던 요단 동편을 얻어냈던 지파들처럼 해야만 합니다.
      


최소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합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은 원래 행해야 하는 일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치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그들의 처자들을 견고한 성읍에 최소한 병력과 함께 놔두고 그들은 요단 서편으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여호와의 정복 전쟁은 그대로 치뤘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는 것은 우리의 최선의 그것보다도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그 시간 때문에 혹은 다양한 이유 때문에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것도 포기함 없이 원하는 것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0: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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