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5-8)
        
지난 1년은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뜻깊은 한 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난 몇 년 동안 흔히 503이라고 불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전횡 그리고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가 깊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 아닌 한 개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사람들은 절망했으며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들은 의지를 불태웠고 서로 힘을 모았습니다. 정의는 침묵하지 않는 개인들의 모임으로 인해 다시금 불타오를 수 있다라는 사실을, 세워질 수 있다라는 사실을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한다면 지난 1년 동안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장르 즉 애니메이션이나 슈퍼 히어로 영화 같은 경우는 보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영화관에서보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보는 경우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저는 영화 비평을 하는 영상을 즐겨보고는 합니다. 특히 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을 잘 보는 편인데 어제 이 영화당을 보면서 인상 깊은 말들이 나와서 페이스북에 사진만 올렸습니다. 어제 내용은 혹성탈출 시리즈 리부트 1편 2편과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영화평을 하는 중에 이동진 평론가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게 되는데 유인원에 속한 존재들 속에서도 평화를 원하는 진영, 전쟁을 원하는 진영이 있고 인간에 속한 존재들 속에서도 평화를 원하는 진영, 전쟁을 원하는 진영이 있다. 유인원에 속했는가 인간 속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즉 "어떤 집단에 속했다고 해서 나의 정당성이 그대로 확보되지 않는다. 그 집단에서 어떤 이야기,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정당서을 확보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의 말에는 수긍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필요한 고민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라는 말은 다양한 장르의 컨텐츠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도전되는 말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즉 우리가 하는 일, 하는 행동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먼저 우리가 치열하게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오히려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 비유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라는 명제입니다. 그리고 그 명제 속에서 우리가 유독 고민을 많이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부분은 열매라는 것인데 그 열매가 사랑인가 전도인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더욱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다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양분을 요구합니다. 축복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사역을 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은사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안에 계시는가, 나는 그리스도와 붙어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 확실한가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이 먼저 선행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세상에서 끼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0-34)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 속에서 마찬가지의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의 고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하는 고민은 따로 있다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 위에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순서를 보면 그의 의를 먼저 구하지 않고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먼저 우리는 하나님 나라 자체를 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의 복,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구한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 나라로 번역된 저 말은 하나님 나라라고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영향력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존재들인가,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가, 우리는 변화되어 있는 사람인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물어보신 것입니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영향력 혹은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존재가 당연히 될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누군가의 자녀가 되는 것, 어떤 단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더욱 중요시 여겨야 한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행동으로 자연적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우리에게 한계가 명확하게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14-20)
    
마틴 루터가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말하는 야고보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오히려 우리는 믿음의 위대함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명확하게 그리고 여실히 보여줍니다. 단순히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그들의 열매로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싹을 틔우면 당연히 자라나게 되고 충분히 양분이 공급되면 가지는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열매를 맺고 있다면 우리의 의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문제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하나님께로 매일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남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성령이 없고 우리 안에 단순히 세상의 노력, 의지만 있다면 세상 속에서 의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으며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노력으로 안 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더욱 성령을 사모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해야만 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로 가는,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얻었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시고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싹을 틔웠다라는 것 즉 우리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생명의 유무를 확인하지 않고 부지런히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생명이 없는 종이인형을 억지로 움직이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맛보고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4-2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 다르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가예수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한 사람으로서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악한 일을 행한 사람으로서 심판의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정말로 많습니다. 그것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는 인간의 노력, 인간의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내주하셔야 하며 믿는 모든 사람에게 허락한 생명이 그 인간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가지가 나무에 연결되어 열매를 맺듯, 싹이 틔워서 식물이 되듯 우리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선함을,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유지하고 선언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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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하건대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민 22:16-1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 나의 구원자, 나의 창조주로 믿는 바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 속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보다는 세상에 타협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단순히 주일 성수의 개념에서 타협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바로 두 번 째 발락에게서 온 고위 관직자들이 발람을 만났을 때 만들어졌습니다. 발람은 자신이 모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시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발락에게서 온 고위 공직자들이 자신의 집에서 유숙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추측한다면 발락이 보낸 첫 번째 고위 공직자들이 그 다음날 떠났을 때 발람이 완고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충분히 됩니다. 그렇기에 발락이 두 번째 고위 공직자들 - 처음 공직자들보다 높은 - 을 보내 성의를 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든 발락에게 가고 싶어했습니다. 누구를 저주하든간에 누구를 축복하든간에 발락이 주려고 하는 은과 금을 얻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발람의 마음, 욕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자신의 욕심을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사신이 발람에게 왔던 바로 그 밤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대로, 뜻대로 말할 것을 명령하시고 발람이 떠나도록 하셨습니다.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민 22:20-24)
      
발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발락에게 가는 것이라 확신하고 나귀를 타고 발락의 사신을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여정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발람의 길을 막으시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를 정작 하나님의 선지자인 발람은 보지 못하고 그의 나귀만볼 수 있었습니다. 나귀만 하나님의 천사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발람이 돈에, 욕심에 눈이 가려져서 더 이상 하나님의 천사를 볼 수 있는 눈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발람이 하나님의 천사를 볼 수 있었을 정도로 하나님과 관계가 좋았다면 나귀를 치는 일도, 나귀가 그의 몸을 상하게 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하나님의 천사는 발람의 눈을 밝히셨고 그 때에야 비로소 발람은 자신의 길이 하나님이 막으시는 길이며 또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길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욕심과 욕망에 눈이 가리워져 나귀도 볼 수 있는 여호와의 천사를 보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죽음의 길을 향해,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을 향해 불나방처럼 가는 발람은 나귀의 목숨을 건 도피 끝에 기회를 얻었고 결국 하나님의 천사를 볼 수 있게 되어 잠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지자가 될수 있었습니다.
    
나귀가 하나님의 천사를 볼 수 있었고 후에 나귀가 사람과 말을 하게 된 것은 발람이 욕심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였으며 하나님의 천사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발람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돌이키시기 위해서 그의 나귀를 써서 그를 깨닫게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나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발람은 하나님의 명령에도 스스로의 욕심을 굴복시키지 못하였고 결국 나중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 안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정결한 믿음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민 22: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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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3-15)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렇게 해도 되니까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즉 노동자의 권리를 탄압하는 경영자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탈하는 일부 노조들, 가족의 재산을 탐하는 또다른 가족, 왕따를 만들어내는 가해자들 모두 그들 스스로에게는 모두 합리화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으며 그것 이상으로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뿐 특별한 혹은 특이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우리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고 우리도 잘못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된다라는 마음이 드는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 악은 찾아오게 되고 우리 안에 수많은 잘못을 향해 경주하는 마음들이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하나님 안에 인간이 있기를 소망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지만 정작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서로 물고 뜯는데, 새로운 육체의 죄악을 저지르는데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이용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고 스스로 부르짖고 있지만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16-18)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안에 계셔서 말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우리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때가 수없이 많이 묻어 있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심, 육체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매일 매번 하나님을 배반하고 성령을 근심시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 자신의 잘못들, 우리 자신의 범죄들에 대해서 변명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자연스럽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움직이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은 우리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움직이게 하고 육체의 열매를 소망하게 합니다. 그러한 육체의 열매가 우리 자신을 지옥의 수렁에 빠뜨리게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방패로 하여 하나님께 그리고 성령님께 교만히 말합니다. 어쩔 수 없다고, 노력했는데 힘들었다고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과 붙어 있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당연히 육체의 소욕, 육체의 범죄, 육체의 욕심을 멀리하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3-45)
          
이 육체의 소욕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고 도우심으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자유를 단순히 비움으로 만끽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너무나도 연약하고 우리의 육체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순간 이전에 비워졌던 육체의 욕심은 더 많은 욕심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과 육체를 유혹하며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되니까 육체의 욕심을 그대로 따르는 것에 익숙한 우리의 육체는 우리를 죄의 구렁텅이 안으로 집어넣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간구해서 우리 안에 가득채워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귀신이 쫓겨난 다음에 더 강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우리의 마음의 자리에 앉게 되고 그렇게 되는 순간 이전보다도 더 형편이 좋지 않게 됩니다.
      


자유를 만끽한다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우리 안에 가득 채우고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자라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지속적으로 주님 앞에 세워, 그리스도가 내 안에,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게 하여 하나님의 참 평안을 참 자유를 누려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우리 안에 거룩함이 사라지고 텅 빈 공간만이 있다라는 것은 육체의 열매를 우리 안에 들여오게 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육체의 열매, 육체의 소욕, 육체의 범죄가 가득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놓치지 말아야 하며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실 수 있도록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간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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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욥이 말문을 열고,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울부짖었다(욥 3:1, 2).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 모든 것을 가졌다가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사람, 재산도, 아이들도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사랑도 이제는 잃어버리고 건강마저도 모두 잃어버린 상태에서 그는 마지막 마음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재앙만이 그를 가득히 둘러싼 바로 그 때 그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기에는 그의 마음에 신실함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 슬픔은 그를 잠식하였고 그는 그곳에서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하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살아남아야만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자신의 삶을 저주하였던 이유는 그의 친구들이 찾아오면서 그의 마음이 급격하게 무너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친구들의 위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잘못한 적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는 친구들이 자신의 생각을 인정해주기를, 자신을 두둔해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가 처한 모든 상황은 욥 그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저주를 받았고 결국 그렇게 저주 가운데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그는 친구들의 두둔이 필요했습니다.
    
친구들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욥이 잘못했기에 저주를 받은 것이고 잘못했기에 저주 가운데 죽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욥을 위하는 마음으로 -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 욥에게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라고 고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고언은 오히려 욥의 마음을 격발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저주할 수 없었던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었던 하나님께 비난의 소리를 할 수 없었던 그는 친구들을 비난하고, 친구들을 저주하고 친구들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욥이 대답하였다. 네가 언제까지 내 마음을 괴롭히며, 어느 때까지 말로써 나를 산산조각 내려느냐? 너희가 나를 모욕한 것이 이미 수십 번이거늘, 그렇게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럽지도 않으냐? 참으로 내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문제일 뿐이고, 너희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너희 생각에는 너희가 나보다 더 낫겠고, 내가 겪는 이 모든 고난도 내가 지은 죄를 증명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그물로 덮어씌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욥 19:1-6).
    
욥은 친구들에게 원했던 위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친구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셔서 자신의 의를 인정해주십시오. 증명해주십시오. 친구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가 잘못해서 이렇게 재앙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위로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말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원망의 목소리도 있고 비난의 목소리도 있지만 그는 결국 원했던 것은 하나님이 없다라는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대화하는 것 단 하나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겠다.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로 나 같은 자와 다투시는지 알려 주십시오(욥 10:1).
       
그리고 그 다음 하나님이 현신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요구에 응답하시지도 않고 다른 네 명의 욥의 친구들의 말에 응답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광막하심,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의 막측함을 주장하십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의지를, 하나님의 창조물을 창조하신 그분의 의지를 욥은 이해할 수 있느냐고, 이해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의 이유를 근거를 대보라고 하는 것이냐라고 욥에게 묻습니다.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1-6).
    
욥은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을 인지합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자신에게 답해달라고 자신이 버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달라고, 단번에 죽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욥은 하나님께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신의 능력, 의지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욥은 그것을 당연히 알 수 없으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주신 것 하나만으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음성이 단지 듣고 싶었던 것이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왜 이렇게 많은 절망, 고통, 재앙을 주셨는지 솔직히 알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나중에 있을 갑절의 복보다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응답하셨다라는 것 하나가 더 큰 복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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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욕심이 많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아니 인간으로서 좀더 누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욕심을 부립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욕심이 많고 그 욕심을 이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욕심보다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하지만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부와, 우리 자신의 누림을 더욱 원하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러한 속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혹은 이해하지 못하고 종종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인양 착각하고 우리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착각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자의적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우리 자신뿐 아니라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기 때문에 누가 옳은 것인지 가려내기가 너무나도 힘이 든다라는 사실입니다.
    


어제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광야 그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시고 그 안에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갈 바, 그들이 쉴 곳, 그들이 움직일 때, 그들이 머무를 때를 지정하시고 명확하게 그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구름의 방법으로 불의 방법으로 필요할 때 필요한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님께서는 주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는 하루 빨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좀더 오래 좀더 같이 있기를 원하셨고 그들은 그렇게 있어야만 했습니다.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다라는 것, 주님과 동행한다라는 것을 그들은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서 배웠습니다. 척박하고 메마른 땅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구름 기둥으로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하셨고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사건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착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눈으로 보면서 광야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나팔 두 개를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의 천부장 된 지휘관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 너희가 그것을 크게 불 때에는 동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며 두 번째로 크게 불 때에는 남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라 떠나려 할 때에는 나팔 소리를 크게 불 것이며 또 회중을 모을 때에도 나팔을 불 것이나 소리를 크게 내지 말며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민 10:1-10)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하실 때에 백성들은 자기들 맘대로 움직이지 않고 우왕좌왕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나팔로 제사장들이 신호를 하면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나팔 소리에 맞춰서 자신들이 움직여야 할 때,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때, 멈춰야 할 때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자신들 맘대로 은나팔을 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대로 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또한 은나팔을 불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나팔에 따라 질서를 가지고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사역자로서 사역의 대상자에게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만큼 위험한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요구하신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만 할 것입니다. 단순히 사역자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그러한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역자들은 자신들이 은나팔을 쥐고 그것으로 사역의 대상자들을 이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들과 사역의 대상자들 모두에게 말씀하셨고 사역자들은 규모 있게, 질서 있게 교회가 그리고 사역지가 움직일 수 있도록 정리하는 역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동할 때도, 적들을 대적할 때에도 은나팔은 불려야만 했습니다. 그 은나팔로 인해서 일사분란하게 백성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은나팔이 주는 권세 때문이 아니라, 은나팔을 부는 제사장의 권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를 백성들이 보았기 때문에 먼저 알고 있었으며 대적들을 향해 나아가는 백성의 마음이 담대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함께하셔서 이스라엘의 방패가 되어주실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역자는 돕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사역자는 하나님과 사역 대상자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 사역의 대상자들이 하나님을 대화할 수 있도록 소통할 수 있도록 서포트 해야 하며 사역의 대상자들이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게 되면 선한 싸움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돕는 기도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사장이 은나팔을 붐으로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방패가 되시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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