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 17:1-3)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번지는 것을 반기지 않습니다. 논쟁이 치열한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에 타협하고 주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수긍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낫다라고 생각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주님의 일에 합력하는 것인데, 주님의 뜻에 맞는 사람과 협력하는 것인데 우리는 세상의 방식으로 합력하고 세상의 이익에 같이 눈이 멀어버립니다. 다툼도 논쟁도 싸움도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어기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매번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그들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논쟁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 보고 믿고 싶은대로 믿는 자칭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말이 틀렸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의 제자들의 육체의 소욕을 좇고 빵만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모습을 경계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라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고 나온 사람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다시금 세상 속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세상 속에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비단 이단의 교리를 가진 사람들뿐만 아닙니다. 넓은 길로 가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증인으로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당신의 뜻대로 세상 속에 나아간 사람들에게 당신의 증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분열을 일으키라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라고 말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행 17:5-9)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으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 된다면 즉 할례를 받고 유대교에 입교하고 유대인으로서 삶을 이어간다면 로마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대제국 로마는 한 국가에 국한된 종교는 핍박을 하지 않습니다. 마치 지금의 중국이 일정 수 이상의 신도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종교라면 터치를 하지 않지만 일정 수 이상의 신도수를 가지고 있으면 엄청난 탄압을 하듯이 대제국 로마 또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을 터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은 아예 믿지 않는 것보다도 더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부분에서는 타협할 생각이 1퍼센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죽음의 위협도 감당하면서 매번 회당에 들어가서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한 자신을 위협하는 도시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를 비난하고 질타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자칭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도시를 건너서 오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피하면서 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그들을 피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 가운데서 그들은 로마에 적대적인 말씀을 퍼트리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사도 바울은 정말로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행 17:10-15)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 거리는 대략 백킬로미터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울에서 천안 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당시 로마 제국은 지금처럼 전화 시설도 없었고 교통 시설도 없었기에 도보로 움직이거나 말을 타야만 했습니다. 그 먼 거리를 움직여서 사도 바울은 다시 베뢰아의 유대인의 회당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자신을 정말로 미워하는,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만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바로 그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바울은 회당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죽을 뻔 합니다. 매번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죽을 뻔 하고 이방인에게 간다고 선언하지만 그러나 다시금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유대인의 회당에 다시 들어갑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서 죽을 뻔하고 가이사랴에서 유대인들에게 계속 고소를 당하여 황제에게 재판해달라고 하기 위해서 가게 된 로마에서도 그는 유대인들을 먼저 찾아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씀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사도 바울은 그들을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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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과거 1992년 재림 광풍이 불었던 때에 당시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시한부 종말론주의자 한 명의 말이 아직도 마음에 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혹시나 오시면 그 분을 만나뵙고 10월 28일에 오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라고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앙관은 양쪽 모두에 발을 디디고 있다가 하나가 틀리면 다른 하나로 자리를 이동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였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었고 그는 다시 발을 옮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험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믿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죽음 이후를 준비하고 삶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경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믿지 않는 사람들 중 일부는 믿는 그리스도인, 경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권유합니다. 세상의 것을 같이 누리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방법은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19-24)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양자 택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돈을 섬기는 것, 세상의 가치를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함께 갈 수는 없습니다.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둘 다를 모두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우리를 부르셨을 때 우리에게 생명과 사망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세상의 가치, 세상의 판단을 더 먼저 따지고 하나님을 그 다음으로 따져서는 구원을 얻을 수도 없으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사역했을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 율법 주의자들에게 혹 했던 이유는 두 가지 정도 됩니다. 하나는 로마인들은 종족 신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지만 종족을 불문하고 퍼지는 신들에 대해서는 인정해주지 않으며 그러한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황제도 같이 숭배해야만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종족신들을 믿는 사람들도 황제를 숭배해야 하지만 야훼를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러한 특혜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특혜는 비단 팔레스타인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로마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주는 특혜라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1, 12)
      
그렇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하게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유대인이 되는 것을 선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할례를 받기만 한다면 유대인으로서 적을 올리게 되면 고난을 받을 필요 없이 그리스도를 마음껏 섬길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도했던 바나바도 그리고 바울도 유대인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꼼수를 통해서 피해보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에서 시키는 것을 하는 것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영민하게 꾸릴려고 한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율법적으로 즉 제의를 드리고,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 즉 그들은 세상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확신이 없었기에 자신의 몸에 새기는 것으로 그 확신을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정말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인가 확신이 부족하여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확신 꺼리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6-9)
     
방언은 분명히 우리에게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유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과거 미국의 오순절 교단의 일부 사람들은 방언을 받는 것이 구원의 한 증거라고 믿기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에 눈에 보이는 증거 즉 방언을 하는 것으로 그 증거를 삼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은 사람들 즉 방언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증거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방언은 선한 것입니다. 방언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언이 하나님을 믿는 그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방언이 그 근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바로 그 믿음이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수많은 위험과 위협 그리고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한 위험과 위협 그리고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갑옷으로 우리 자신을 둘러싸게 되는데 그러한 갑옷이 가끔은 우리의 숨을 막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저는 인정받은 유대인이라는 감투를 쓰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할례를 통해서 얻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핍박을 피하려 하지말고,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다른 것에서 찾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며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 이끄는 단 하나의 필요충분 조건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세상의 방법, 그 어떤 이단의 방법을 하나님을 믿는 주요 조건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주요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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