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도다(삼상 10:17-19상)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스바에 모여 왕을 뽑는 제비뽑기를 시행하였고 암몬 왕 나하스를 패배시킨 뒤 뽑힌 왕 사울을 길갈에서 왕으로 옹립하게 됩니다. 이 두 사건 사이에 암몬 왕 나하스가 있는 이유는 길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였던 때에 사무엘이 언급한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이상 살아계신 이스라엘 왕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버리고 - 제대로 섬긴 적도 없기는 하지만 - 인간 왕이 자신들을 다스려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국가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체제가 왕정으로 정비가 된 이후에 이스라엘이 분명히 지파 체제 그리고 사사 지도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분명하지만 훨씬 더 빨리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으며 왕의 반역, 왕의 타락이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이방신들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인 타락이극심해진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견하셨고 사무엘 또한 어느정도 인지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사울 왕의 타락 그리고 다윗 왕의 인내, 솔로몬 왕의 타락까지 사실 다윗 왕을 제외하고 처음에는 괜찮다라고 여겨졌던 수많은 왕들의 타락은 예견되어진 상태입니다. 여호사밧 왕, 히스기야 왕, 요시야 왕을 제외하고 다윗 왕처럼 하나님을 섬겼던 왕들은 거의 없었을 정도로 왕들의 타락은 계속 이어졌고 어찌 보면 왕이라면 언젠가는 타락하는 것 아니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울 왕을 뽑 이후 이스라엘은 극도로 종교적으로는 분명히 침체의 시기를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이제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삼상 12:12-15)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사기 시대 이후부터 사무엘 시대까지 이스라엘의 타락은 계속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 왕정 시대와 사사 시대의 차이점은 사사들의 타락이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기드온과 삼손 - 빈도 수 자체가 적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또한 사사의 타락과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타락은 왕정 시대에도 사사 시대에도 계속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왕정 시대에 총체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였는가라고 물어본다면 단 하나 지도자들의 생각의 변화입니다.
    
사사 시대의 사사는 아비멜렉을 제외하고는 - 그는 사사로 불리지도 않았지만 - 자신들이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 스스로 언급한 것처럼 - 사무엘의 두 아들이 사사이기는 했지만 왕정으로 바로 넘어갔기에 - 적어도 사사들은 자신들이 왕이라는 생각을 가지기보다는 왕이신 하나님 아래에서 재판하는 사람 혹은 전쟁을 치르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여겼습니다. 물론 입다와 같이 왕으로서 보이는 조짐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언제든지 내침을 당할 수 있는 사사, 언제든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내보냄을 당할 수 있는 사사들과 다르게 왕들은 자신들이 왕이기에 자신들 맘대로 이스라엘을 재단하려고 했고 종교 행사도 맘대로 치르려고 했으며 이방 신들을 들여오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권력의 사유화, 외교로 인한 국가의 안정, 백성의 마음 다스리기 정도입니다. 이에 반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듣기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으며 이방신들이 국가를 장악한 이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는 나라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말합니다. 그들이 왕을 구하는 것은 친히 왕되신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은 전쟁의 지도자로서 왕을 구한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그 이전까지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정치와 종교를 구분시키게 되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정치 권력에 순응하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히 버려버릴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시리라 이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레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니라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삼상 12: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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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회막을 바라본즉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더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 앞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하시매 그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민 16:41-45)
          
40여 년의 광야 노정이 끝나갈 즈음에 고라는 종교 권력을 취하기 위해서,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온은 정치 권력을 취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나름대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40년 전에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야 했지만 당시 그리고 지금의 최고 권력자인 모세와 아론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좌절이 된 이후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아다녔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그들만의 착각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순종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당시 모세와 아론이 자신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는지,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스라엘을 막아섰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이 경각이 달려 있었다는 그 사실이 그들의 머리 속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기억하지 못하는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잘못,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다른 것에게 떠넘기는 것이 일상이 된 존재들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처럼 말입니다.
        
고라와 다단, 아비람 그리고 온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등에 업고 모세와 아론에게 대적하려고 했다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난 그 다음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기 위해서 나섰습니다. 빌미는 여호와의 백성을 모세와 아론이 죽였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어제 일마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라, 다단, 아비람, 온 그리고 이스라엘의 250 지도자들을 죽인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며 엄혹히 말한다면 고라, 다단, 아비람, 온 그리고 이스라엘의 250 지도자들의 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을 절멸시키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40년 동안 있어왔던 광야에서 떠도는 생활 그 자체를 소멸시키고 싶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만 없어진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든 아니면 다른 땅이든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시내산에서 빽빽한 구름 사이에서 그들과 만나셨던 여호와 하나님과 그들은 언약을 맺었지만 인간은 이미 잊어버렸습니다. 바로 그 전날 고라와 다단, 아비람, 온 그리고 250 지도자들이 죽어나갔던 바로 그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지만 그들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불리한 것은 언제나처럼 그들은 잊어버리고 맙니다.
        
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의 잘못을 참회하고 자숙해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모든 죄악, 그 모든 처벌을 모세와 아론에게 떠넘기려고 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의 불을 향로에 담아 향을 피우고 현재 자신들의 죄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가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을 방금 죽이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몸으로 막아서기 위해서 모세와 아론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 하나님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수없이 많은 압박들을 받고 있으며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을 위하지 않고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한다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받을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비난을 받고 비판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신을 핍박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위험에 뛰어들어서 그 사람을 구해야만 합니다.
          
아론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 염병이 그치매 아론이 회막 문 모세에게로 돌아오니라(민 16:47-50)
    
모세와 아론은 사역자이며, 지도자입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을 위해서 하나님께 신원하였으며 방법을 찾아서 염병이 퍼져 죽어가는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서서 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라와, 다단, 아비람 그리고 온처럼 사람들의 불만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권력 욕구를 성취하려고 하는 지도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이 원하시는 지도자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 죽어줄 수 있는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막아섰던 것처럼, 모세와 아론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킨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셨을 때 엎드렸던 것처럼 무너진 성벽 앞을 막아서서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그 사람들을 살려달라고 말하는 그러한 지도자를 여호와 하나님은 찾으셨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지도자를 찾고 계시지만 많은 주님의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안위가 더욱 걱정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겔 때에 그러한 지도자를 찾지 못하셨던 고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멸망을 받게 되었으며 아브라함도 결국 하나님과 10명의 의인을 찾겠다고 하였다가 절망을 하였지만 모세와 아론은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버린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십자가 위에서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독교를 미워하는 사람들, 비판하는 사람들을 성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서 있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2: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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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더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민 16:12-14)
      
이스라엘의 후손들, 모세가 이끄는 백성들이 이집트를 출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걸렸던 시간은 40여 년입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성경에서 말한대로 군대를 이루는 60만 명 이상의 되는 사람들이 죽게 되었고 자기 죄로 인해서 죽게 된 그들 이후로 있었던 사람들마저도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게 되었다라는 그 사실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그들의 광야 노정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대부분 그렇지만 자기가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들으며 믿고 싶은대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믿고 싶은 사실을 진실로 스스로 확신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왜곡된 진실을 강요하게 됩니다. 특히 레위 자손 고라와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온은 당을 짓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기에 이르릅니다. 그들이 보기에 자신들의 광야 노정의 이유는 바로 모세와 아론의 잘못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집트와 접점이 혹시나 있을 히브리 노예 출신들은 대부분 죽어나갔기 때문입니다. 고라와 다단, 아비람 그리고 온이 원한 것은 권력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사십여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리했듯이 자신들이 치리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비람과 다단 그리고 온이 정치적인 권력 즉 모세의 권력을 탐했다면 고라는 종교적인 권력 즉 아론의 권력을 탐했습니다.
    
고라와, 아비람, 다단과 온 모두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에게 250 지휘관들이 함께 했고 나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그들의 반란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던 모세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아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아론 모두를 버려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반란자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지했을까요?
     
사십여 년의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자신들의 힘든 이 상황의 이유를 여호와 하나님께 물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죽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러한 광야 노정을 만들 수밖에 없게 된 이유는 이미 죽은 열 명의 정탐군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정탐을 보낸 모세와 아론의 잘못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들 머리에 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들이 당을 짓고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했다라는 그 사실은 그들의 머리 속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든 고난의 행보, 광야의 노정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들의 잘못은 당연히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없고 말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왜곡된 생각은 결국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였다라고 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선택은 이후 불뱀의 고통을 받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수없이 많은 인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잘못을 직면해야 할 때 직면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버리면 그 당시에는 편합니다. 자기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를 할 수 있으며 자기가 지금 혹시 힘들어 한다면 그 힘든 이유를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밀어버려 스스로는 평안함을 얻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잘못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감언이설로 우리를 속이려는 사람들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은 어쩔 수 없었다라고 속입니다. 그리고 그 속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마저 그들은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에 뿌려진 씨앗을 새가 먹어버리듯이 회개할 기회도, 하나님께 나아갈 기회도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하며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를 숨기기 위해서 죄의 수렁에 빠지기 전에 말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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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산당에서 내려 성읍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그들이 일찍이 일어날새 동틀 때쯤이라 사무엘이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이르되 일어나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하매 사울이 일어나고 그 두 사람 사울과 사무엘이 함께 밖으로 나가서 성읍 끝에 이르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환에게 우리를 앞서게 하라 하니라 사환이 앞서가므로 또 이르되 너는 이제 잠깐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더라(삼상 9: 25-27)
      
어린이 성경학교 때부터 대예배까지 모든 예배에서 다윗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많이 다뤄집니다. 다윗은 대왕이라고 불려졌던 히브리 민족의 두 번째 왕이며 수없이 많은 영웅 서사시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하나님의 사랑까지 받았던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해서 사람들은 더 많이 알기를 원하고 그에 대해서 더 궁금해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만큼 그의 대적자 중 하나였던 사울 왕에 대해서는 대부분 왜곡되이 말하거나 적어도 그의 이야기를 축소해서 말합니다. 그를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고 싶지도, 이해할 생각도,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던 히브리 민족의 왕이었다라는 사실, 다윗보다 먼저 왕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지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기에 이스라엘에 왕을 두고 싶지 않았던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스라엘에 왕을 두고 싶다면 꼭 이 사람으로 해라라는 식으로 사울 왕을 선택한 것이라는 것 즉 그만큼 사울 왕을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인정하셨다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다윗 왕 이전의 사울 왕과 사무엘 이야기, 그리고 사울 왕과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편견없이 성경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귀들을 찾으러 사환들과 베냐민 땅을 떠돌아다니던 사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선견자에게 찾아가 나귀들의 행방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하나님의 선견자 사무엘은 하나님께 싸인을 받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신 왕의 재목이 사무엘을 만나러 온다는 바로 그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결국 사울과 사환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준비해놓은 자리에 같이 불러들여 그들을 대우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무엘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운다라는 것 그 자체를 그리 좋아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울과 대화하는 것에, 사울에게 기름 붓는 것에 그리 인색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역시나 사울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기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했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시기를 원하셨다면 자신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대접하기를 마친 사무엘은 자신과 사무엘이 거처하고 있던 집 지붕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서, 얼마나 대화를 이뤘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 이후에 그 다음날 잠에서 깬 사울에게 사무엘은 거리낌 없이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이끄시는대로 행하라고 권고합니다. 물론 사무엘은 사울이 어떠한 사람이든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기에 기름을 부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과 사울의 대화는 의미심장합니다. 그 대화 이전에 사무엘은 사울을 예의를 다합니다. 사울의 집과 사울이 이스라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울이 하나님이 택한 왕이라는 사실을 사무엘이 인지한 것이지만 둘의 대화가 마쳐진 이후에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사울이 어떠한 사람인지 어느 정도 파악을 한 것 같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후에 왕을 뽑는 이스라엘의 모임 속에서 사울이 어떠한 행보를 보일 것인지에 대해서 사무엘은 적어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0여 년 후에 사울과 사무엘은 완벽히 갈라지지만 그러나 그 갈라질 때에도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힘들어 하고 울적해 있습니다. 마치 오래된 벗과의 이별을 하는 것처럼말입니다. 새로운 왕을 뽑아야 한다고 이새의 집으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거부 의사를 보이기도 합니다. 사울에게 죽을까봐라고 말하지만 반 정도는 그 이유가 맞는 것 같고 반 정도는 가기 싫다라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마저 추측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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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왕상 18:21-24)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신이 있고 자신들만의 미래가 잇으며 자신들만의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러한 그들만의 것들이 그들을 구원해줄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의 문제 모두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때 그들은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든 해야 하는데 할 수 없는 절망감은 스스로를 절멸에 이르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오늘을 잡아라, 오늘을 즐겨라라는 말인 카르페디엠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금과옥조와 같은 격언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즐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것이 없습니다. 단순히 돈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삶의 황폐하며 생활이 메마릅니다. 좋은 것을 얻으려고 하고 자극적인 것을 얻으려 하며 쾌락을 더 선호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얻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만 가다가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갈 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엘리야 앞에 서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믿고 따랐던 풍요의 신 바알이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데 그 가뭄을 해갈시켜주는 신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비였고, 오로지 풍요였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수입해온 풍요의 신 바알은 그 역할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려고 꼭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엘리야가 누구 편에 설 지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머뭇거렸던 이유는 그래도 풍요의 신 바알을 미워해도 다시 한 번이라고 그가 비를 내리기만 한다면 다시 돌아올 생각이 있다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알이 이긴다면 그리로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명기의 복들, 즉 과거 모세가 말했던 풍요의 복들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략 육십 년의 세월동안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뭔가를 주지를 않았는데 갑자기 가뭄을 일으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았는 존재나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알에게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왕의 공포 정치로 인해서 삶이 무너져내린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풍요의 신 바알을 따르려고 하는 그 북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으로 그들에게 비를 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자신의 길이 옳다고 이야기하고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바로 그 때에 엘리야는 자신에게 호응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얼마나 바알이 풍요의 신이 헛된 신인지를 알려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특히 사역자는 하나님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정말 각자가 뜻하는대로 가려고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뿌려야 하며 그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해야만 합니다. 선량하지만 가난하고, 겸손하지만 유약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만족을 위해서,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자기들의 이익 때문이었지 권력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즉 왕의 권력과 백성들의 이익이 맞닿아져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은 버리고 풍요의 신 바알을 따랐던 것이며 우리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주님의 교회를 신경쓰지 않거나 이용하거나 버릴려고 하는 단점 투성이의 사람들을 위해서 사역자는 사역해야 하며 기도해야 하며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역자의 부족함이 있기에 사역자도 화를 내고 분노를 흘리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부족한 사역자를 통해서 영악한 사람들을 끌어모으십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 18: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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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갈멜산에 선 엘리야는 자신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옆 즉 상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신 옆에 서 있는 자들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팔백 오십 명이며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대략 육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금송아지를 택했다가 이제는 바알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정말로 유명무실해질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최대한으로 잡아서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바알을 밀었던 때를 유추해보자면 오므리 왕조의 창시자인 오므리의 12년 그리고 그리고 아합의 이십 사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이전 그 어떤 신들보다도 바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마치며 살아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가 그들의 종교를 정책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 스스로가 풍요의 신인 바알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25백년 전인 바로 그 때이기에 우리와는 종교 생활을 하는 이유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대략 백여 년 전만 해도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떠한 신이라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마저도 복을 주는 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에, 혹은 교회에 오는 것이 이득이 되기에라고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할지라도 마음 속에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인격적으로 만나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뱃지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패션처럼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젊은 사람들, 인맥 확보를 위해서 교회를 다니려고 하는 어른들까지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 안에서 우상을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나님보다 사역자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도 고민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 때의 금송아지는 출애굽을 시켜준 그들의 영도자로서 만들어낸 신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더 따르려고 하는 의지를 가졌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한낱 금송아지로 바꿔버린 그들처럼 우리도 돈으로, 인간인 그 누군가로 하나님을 치환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바로 그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해준 것이 없는데 왜 믿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갖는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요를 바라고 바알을 믿는 것처럼 재화나 물질이라고 그들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갈멜산에 모인 이유는 국왕이 소집해서 모이기도 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이스라엘에 가뭄이 생겨났는데 그 가뭄의 이유가 바로 엘리야 그리고 엘리야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기에 그들이 모인 것뿐입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왕상 18:22-24)
    
그들은 가뭄만 해갈이 된다면 바알 편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바로 그 신이 진정한 신이 아니냐라고 일갈했을 때 그들은 엘리야의 말에 찬성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릴 정도의 힘을 가진 신이라면 가뭄도 해갈시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가 지난 삼 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였기에 지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지 우연이라도 비가 한 방울이라도 왔다면 그들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경 생활의 풍요를 위해서 언제든지 금송아지든, 바알이든 여호와 하나님이든 자신들의 신을 바꿀 위인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우리에게 좀더 나은 대우를 해준다면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그 직장에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 사역자들은 그러한 유혹을 받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 그러한 유혹을 받게 되고 그 유혹에 따라 자신들을 버리고 교회를 버리며 하나님을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 자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있는 것 그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트로피인 것입니다. 갈멜산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직 엘리야 하나뿐입니다. 그러한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설령 엘리야가 아니 여호와 하나님이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린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을 사람들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믿고, 풍요로움을 꿈꾸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엘리야가 비를 내린 다음에도 쫓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가이세벨이 그를 쫓았지만 그 이상으로 그 누구도 엘리야를 보호해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비였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었으며 여호와의 선지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엘리야는 자신을 버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향해 손을 내미십니다. 함께하자라고 말입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 18: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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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로 많은 사사들이 이스라엘 종족 가운데서 명멸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지런히 다른 나라 사람들과 자신들을 비교해가며 왕들이 자신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왕이 있는 강력한 사회, 왕으로 인해 보호받는 사회를 그들은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다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관점이 전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수없이 많은 외침을 받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왕이 없으므로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사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요구하였고 사무엘도 하나님도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요구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4-7)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즉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듣고 믿고 싶은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외세의 침략을 받았던 이유는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며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왕으로서 섬기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이스라엘에게 인간 왕이 없었기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받는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사무엘에게 강력하게 요구를 하였고 사무엘은 하나님께 윤허를 받아 이스라엘에게 인간 왕을 세워줍니다.
   


과거 그러니까 사사 시대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된 행실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을 왕으로서 섬기지 않게 되면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왕이 세워진 이후에는 왕의 성품에 따라, 왕의 신앙에 따라, 왕의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방신에 빠지기도 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도 합니다.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대국에 왕들이 몸을 의탁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의탁하는 경우에는 역시나 그 강대국의 우상들이 유입이 되어버립니다.
   
즉 인간 왕은 다른 나라들과 외교를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겠다라는 것 즉 다른 나라들 즉 강대국들과 교류하지 않겠다라는 명확한 결단이 없으면 언제든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길 수 있는 여지가 왕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백성들은 그러한 왕의 정책에 따라 이방신을 섬길 수밖에 없는 수많은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과거 사사 시대에는 백성들 스스로의 목적에 따라 신앙을 선택하였다면 인간 왕들이 세워진 이후에는 국가 정책에 따라 우상들이 새롭게 유입이 되든지 야훼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하게 된 것입니다.
     
꼭 아비얌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솔로몬 시대부터 들여오기 시작한 우상들이 범람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선택하면 그만이지만 이제는 쌓여버린 우상들이 이스라엘 내에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더 큰 부담을 져야하며 더 큰 정책적 전환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환에 성공하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국가를 경영하는 선한 왕이 되고 이러한 전환을 하지 않거나 자신들의 왕권을 위해서 타협을 하게 되면 악한 왕이 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것은 단순히 사사 시대만이 아니었습니다. 왕권이 강력한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 왕의 뜻대로 혹은 인간 왕의 정책대로 하나님을 버리는 행동을,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점점 더 견고해지는 이방신들, 우상들에 대한 신앙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반 백성들은 점점 더 사그라들어가고 선한 왕들이 나타날 때만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북이스라엘은 그리고 남유다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국가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제사장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요 아비살롬의 딸이더라(왕상 15: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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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민 2:1, 2)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 성년의 수는 육십만 명을 조금 넘습니다. 히브리 민족 혹은 이스라엘 자손이라 일컫는 그들은 처음 애굽으로 야곱의 영도 하에 내려갔을 때는 70명에 불과했지만 어느덧 육십만이라는 대군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은 국가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떼를 이뤘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안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노예로서 살아가는것은 분명히 너무나도 힘든 고통의 나날들이었지만 고센 땅이라는 곳에서 오롯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있었기에 다른 민족들과 섞이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됨이라는 것,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이라는 것이 피가 순수하냐 혹은 순수하지 않느냐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혼혈이든 혼혈이 아니든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우리의 주, 구세주, 창조주로 믿기만 한다면 우리 모두를 당신의 자녀,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하나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순결함입니다. 하나님이 고센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르셨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도 하나님 안에서 성장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없기에 우리는 매번 실수하고 실패하고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주님 안에 있지만 우리는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영에 미혹이 될 수밖에 없으며 육체의 생각에 경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해도 일어나고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는 삶이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떼를 이루고 군대의 군사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성막을 지키고 성막을 따르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그들은 참 오래도록 하나님에게 혼이 나기도 하고 자신들의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 만들기도 하면서 성장해갔습니다. 특히나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 금송아지 우상과 하나님을 동급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께 엄청난 화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모든 순간들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들이 군대가 되도록 그들을 군사로 키우셨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복잡함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거대 민족을 율법을 통해 질서로 세우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우리가 맞딱뜨리고 있는 수많은 상황들은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도 복잡하여 아무것도 그 안에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없다라고, 그 안에서 얻어질 수 없다라고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이 다르고, 매달이 다릅니다. 순간순간 세상의 변화 때문에 낙심할 수밖에 없고 그 어떤 것도 우리는 목표를 세우고 도달할 수없다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새롭게 새우시고 오합지졸인 그들을 군대로 만드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상황, 우리의 조건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질서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명확히 따져보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주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지난 묵상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교회 안에서만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하나님의 증인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사역자만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나아가야만 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열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우리 자신이 복잡스러운 곳에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그 안에서 질서를 발견해야만 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후에도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 뜻대로 여정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청난 과제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을 너무 무섭게 여기지 말아야 하지만 세상을 또한 너무 쉽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도 힘든 곳이기 때문입니다. 매일이 위험의 연속일 수 있으며 유혹이 처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러한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오합지졸에서 군사로 거듭나게 하신 것을 믿고 우리의 상황을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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