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6-10)
          
적어도 아브라함 이전의 창세기 역사는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피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취하지 말라고 하였던 선악과를 취하였고 그로 인해서 더 이상 그들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던 과거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졌으며 하나님과 바로 그 전날까지만 해도 함께하였던 그들은 하나님이 나타나자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그들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타나셨고 인간은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거리감을 두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숨어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들이 숨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물음이 자신들이 벗었으므로 숨는다고 인간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에게 벗었다고 누가 알려주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핵심을 찌르십니다. 아담과 하와, 인간 너희들이 나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던 그 선악과를 먹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합리화를 하고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잘못을 떠넘깁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하와가 자신에게 주었기에 먹었다고 했고 하와는 뱀이 꼬여서 먹었다고 말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를 숨겼습니다. 자신이 먹고 싶어서 선악과에 손을 댔다는 그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흙을 먹을 것이라는 징벌을,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의 수고로움을 아담에게는 노동의 수고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죽음을 징벌로 넘겨주십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버렸고 에덴 동산에서 내쫓김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수렵 사회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고 농경 사회로 이행을 강요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그들에게 뼈아팠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라는 것 그것입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1-5)
     
아담의 후예들은 대부분 노아의 홍수 때 모두 쓸려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땅에 죄가 관영함을 보시고 인간과 함께 지상의 모든 것들을 물로 심판하시려고 작정하셨으나 노아와 노아와 함께 있는 존재들은 살리려고 결정하시고 노아에게 산 위에다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셨으며 그 이후에 그 방주는 지상의 모든 것의 구원의 구유가 되어버립니다. 아라랏 산에 멈춰버린 방주 속에서 인간과 지상의 동물들은 다시 나오게 되었고 다시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후예들인 인간은 땅을 돌아다니다가 시날 땅에 멈추게 됩니다. 시날 땅에서 그들은 탑을 지을 것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들이 땅에 탑을 짓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노아의 홍수로 말미암아 인간의 문명이 사라졌음을 알기에 인간의 문명의 사라짐을 막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으로 탑을 짓자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이며 세 번째로는 시날 땅에 국가를 세우고 집단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빠진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하나님을 찾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못했고 하나님께 그들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에 대해서 묻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서 인간이 탑을 짓는 것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시고 판단을 하시며 그에 따른 심판을 선포하시게 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들의 계획이 언어의 혼잡으로 흩어짐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사람을 영위하게 되며 그러한 삶의 영위는 필연적으로 죄와 연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짐이며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인간은 죄를 지을 수록 더욱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조차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간은 그 스스로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것을 합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자신들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의 책략으로 이겨버리기 위해서 그들은 집단이 되었고 국가가 되려고 하였으며 탑을 지어 하나님께 대항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대항을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응징하셨으며 인간이 복구할 수 있는 피해를 인간에게 입히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나타날 때까지 하나님을 피해서 숨을 것인가 혹은 하나님과 대적하여 승리하기를 원할 것인가를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오직 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그리고 항상 끊임없이 물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적발하실 때까지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처벌을 달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나마 살 수 있는 그나마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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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민 32:16-19)
        
대가를 치른다라는 것은 이전에 없던 것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 지도자를 세우고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일부 즉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해서 견고한 성읍을 세우고 자신들은 이스라엘의 앞에 서서 그들과 함께 여호와의 전쟁을 싸우기 위해서 전력투구할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의견을 제시할 때에는 그 의견에 맞는 대안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오직 자신들이 편할 수 있는 자리만 선택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눕겠으니 너희들은 알아서하라는 식으로 일들을 처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는데 그러한 일들이 세상 일이면 그들은 세상 속에서 인정받지 못할 것이며 그러한 일들이 여호와의 일들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하게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요.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빼앗으실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에서 한 달란트, 한 므나를 받은 종들이 심판을 당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주인과 맺은 언약을 그들스스로 해석하여 깨뜨려버리고 그에 따른 변명만 늘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과 다르게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언약을 세울 수 있는 중도자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대가를 치르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한 사안들을 이야기합니다.
    
분노를 내뱉었던 모세마저도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사실 그들의 아이들만 그들의 처자들만 아무리 견고한 성읍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놓는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는 조건입니다. 물론 최소한의 병력은 요단 동편 땅에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형제들과의 싸움을 싸우러 대부분 같이 가야하는 상황입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하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차지하고 싶습니다. 요단 동편 땅에서 우리의 처자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요단 서편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정복 작전에 우리도 참여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처자들을 주님께서 보호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그들은 제안과 함께 드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요청을 모세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맹세대로 여호와의 싸움 즉 요단 서편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을 같이 수행하겠다면 그들이 원하는 요단 동편 땅을 그들의 땅으로 주겠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형제가 안식할 때까지 그 싸움을 멈추지 않으면 요단 동편 땅의 안녕은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대가를 치르는 땅인 야셀 땅과 길르앗 땅 즉 요단 동편 땅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대리자인 모세가 처음으로 인증한 것입니다.
      
길르앗과 야셀 땅은 대가를 치르는 땅입니다. 그들이 대가를 치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허락했던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땅은 요단 서편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요단 동편 땅인 길르앗과 야셀 땅은그들이 거주하기에 좋은 땅이었고 그들이 머물기에 멋진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이곳이 좋사오니 이곳을 주옵소서라고 요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싸움을 싸우지 않고 공짜로 땅을 차지하려는 그들에게 진노하셨고 길르앗과 야셀 땅을 차지하려던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캐치하여서 그것을 하겠다라고 그들의 조상들처럼 잘못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과 중보자 모세는 그들에게 길르앗과 야셀 땅, 요단 동편 땅이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음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24-30)
    
하나님은 부지런히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단지 하나님의 자녀로만 인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증인으로 우리를 다시 보내십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속해서 수행해야만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포기하고 내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 길르앗과 야셀 땅을 차지하려고 했던 요단 동편을 얻어냈던 지파들처럼 해야만 합니다.
      


최소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합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은 원래 행해야 하는 일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치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그들의 처자들을 견고한 성읍에 최소한 병력과 함께 놔두고 그들은 요단 서편으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여호와의 정복 전쟁은 그대로 치뤘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는 것은 우리의 최선의 그것보다도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그 시간 때문에 혹은 다양한 이유 때문에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것도 포기함 없이 원하는 것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0: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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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에게는 사무엘이 있었고 여로보암에게는 다윗 왕조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과 종교 권력 그리고 각 지파들만의 세력이 있는 상태에서 왕권 강화를 노렸고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게 되면서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과 그것을 지키는 다윗 왕조가 있었습니다. 사울 입장에서,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종교 권력과 지파 세력을 물리치고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것이 참 만만치 않았습니다. 둘의 선택은 갈렸지만 둘다 멸망받게 됩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삼상 13:8-12)
      
사울이 사무엘을 무시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왕권이 워낙에나 취약하고 적들이라 할 수 있는 이방 민족들의 세력은 워낙에 강대하다보니 백성들이 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 살 길을 찾아서 흩어지게 됩니다. 그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인데 문제는 사울은 그러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권한조차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렸으나 마침 또 사무엘은 제 때에 오지 않게 되었고 결국 그는 자신에게 없는 제사 권한을 침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불순종하게 된 것, 사울이 사무엘의 권한을 침탈하게 된 것은 백성들이 자신을 떠나버릴까봐였습니다. 이후에도 계속 나타나지만 사울은 자신이 사무엘에게 즉 여호와 하나님에게 버림 받을까봐도 두려워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약한 왕권을 가진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까봐, 혹은 다윗에게 갈까봐 일생을 두려움에 허덕였습니다. 그 스스로는 강한 척 하였지만 다윗의 있는 곳을 알려주는 성읍 사람들에게 언제나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자신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왕권을 해치는 사람의 말은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가 원한 것은 사울 왕조의 공고함이었지만 그가 원한 것 그것 하나를 만들어가려고 하지만 주변 환경이 그를 절대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방 민족들은 강맹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주는 것 없이 자신만 바라보며 그러한 이방 군사들을 물리쳐 주기를 바라면서도 위험할 것 같으면 언제나 흩어질 수 있는 모래알 같은 군사들만 그의 주변에 있었으며 사무엘은 그를 도와 사울 왕조의 왕권을 반석 위에 두는 것 자체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여러가지 일을 그 혼자 스스로 하였습니다. 좀 강하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병사로 데려다 놓았으며 이방 민족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이스라엘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고 사무엘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의 노력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그는 결정적인 불순종을 하게 되면서 - 이스라엘의 말에 따르기 위해서 -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왕상 12:25-29)
      
여호와의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으로 그는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를 솔로몬 왕은 추격하였고 그는 이집트로 도망가 있었다가 솔로몬이 죽게 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북이스라엘의 세력들의 지지를 얻어 르호보암 왕과 담판을 벌였고 르호보암 왕이 북이스라엘의 요구를 거부하게 되자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지지를 얻어 왕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윗 왕조가 북이스라엘에게 고된 노동을 하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만약 르호보암이 북이스라엘에게 좋은 말로 계속 유혹하게 되면 어느 순간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수 있겠고 그렇게 되는 순간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년 최소한 세 번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스라엘 사람 전부 - 북이스라엘 백성까지 포함하여 - 가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만약 북이스라엘 백성을 회유하게 된다면 그 때는 여로보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백성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못하도록 남쪽에는 벧엘, 북쪽에는 단에 금송아지 제단을 만들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강요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여로보암의 뜻에 따르게 되고 결국 그도 왕권 강화를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떠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살기 위해서, 왕권 강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지만 그의 행동 그 자체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행동이 된 것입니다.
    
처음 왕조가 건립이 되어 백성들도 사무엘도 그리고 사울 왕 본인조차도 왕국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였고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시점이기에 그 속에서 사울의 왕권 강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로 인해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은 다윗 왕조가 자신을 침탈할 것이라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결국 금송아지 제단을 만들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북이스라엘은 대대로 왕조가 하나님을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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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하매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아뢰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민 23:1-5)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행하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사람입니다. 그의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에 그의 사람이 그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연약한 존재이고 자신을 위하는 존재라는 사실도 잊지 않고 계십니다.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의 말을 들었을 때 발람이 돈과 세상의 유혹에 흔들릴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바로 진격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셨습니다. 같이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발람은 두 번째 모압 왕의 사신들이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기준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 돈을 천장까지 쌓아서 준다고 해도 가지 않겠다 - 를 고백했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과 다시 한 번 타협해볼 생각으로 두 번째 온 사신들을 유숙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아니라고 한 사안에 대해서 발람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신만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신명기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38년 전 가데스바네아에서 원래 모세는 바로 진격해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군을 보내기를 요청하였고 모세는 그러한 그들의 요청을 따랐습니다. 모세는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그 정탐군에게 듣지 않는다면 바로 이집트로 떠나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자신의 뜻대로 사람들을 이끄시지 않고 그들의 뜻대로 일단은 버려둡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민 23:19-21)
    
그러나 결정적일 때에 그들을 잡아주시고 그들이 지옥의 구렁텅이로 들어가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상해버린 상태이고, 자신의 결정을 해버린 상태이기에 돌아서기에는 많이 늦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신경써야 하는 대목은 민수기 23장 21절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입니다. 여기서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과 왕은 동치입니다. 즉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라는 사실을 발람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발람은 자신이 자신의 왕이었기에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해서 한 번 더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편에 서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당신의 사람이 당신의 편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롯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고 계시기에 그들을 위해서 기다려주십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 발람이 발락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민 23:25, 26)
  
발람의 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인지 알려주고 있다면 또다른 한 편 아무리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결정을 번복시키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시고 자신의 결정을 인간의 생각에 휘둘려 바꾸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곳 저곳을 옮겨다닌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기도 하고 -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그러한 하나님의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여 하나님께 인간 왕을 달라고 탄원하였지만 그러나 사무엘도 모세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왕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역자도 우리의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역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스스로 정말 그들의 말이 하나님의 뜻과 맞는가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을 바로 그 한 사람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으로 스스로를 던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맡기고 그에게 자신의 일을 행하시게 합니다. 발람이 하나님께 온전히 무릂을 꿇었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당신의 일을 지시하셨듯이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시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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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왕상 20:13, 14)
      
지금의 시리아라 할 수 있는 다메섹은 앗시리아에는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지만 한 지역의 맹주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왕권과 군세를 가지고 있는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다메섹의 왕 벤하닷이 바로 아합 왕 때부터 북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메섹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했던 때는 바아사 왕 때 남유다의 아사 왕의 뇌물을 받고 침공했던 것이 전부였을 뿐인데 아합 왕 때부터는 직접적으로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갈라먹기를 시도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메섹 왕 벤하닷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앗시리아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에 시리아나 북이스라엘까지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므리 왕 때 앗시리아에 오므리 왕이 가서 주종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았을 때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앗시리아의 편에 들어서 자신의 영토와 국가를 온전하게 하려고 했지만 앗시리아의 국력이 좋지 못한 때에 시리아는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서 북이스라엘을 쳐들어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역의 맹주로서 다메섹 왕의 목적은 단순히 북이스라엘을 자신의 휘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최대한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메섹 왕 벤하닷의 행보가 상당히 거침이 없습니다. 일단 고개 숙이고 앗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는 아합 왕 입장에서는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합 왕이 결사 항전은 어찌 보면 그것 외에는 할 것이 없어서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한 아합 왕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무명의 선지자가 다가갑니다. 사실 이 때 아합 왕 입장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때이기도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표적을 보았기에 - 여호와의 가뭄, 여호와의 불, 여호와의 비 - 그 하나님의 힘을 얻는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며 가능하면 모든 가능성을 얻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힌 아합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다가온 여호와의 선지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국력이 충분히 강하고 아합 왕이 수세가 아닌 공세였다면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두 번째 이유는 신하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요할 수 있는 상황을 조정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최근 있었던 여호와 하나님의 표적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음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엘리야를 내쫓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이세벨의 정책 그리고 뒤이어 나온 다메섹의 북이스라엘의 침입을 연결시키지 않을 신하들과 백성들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셨던 것은 당연히 이스라엘 왕 아합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합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호와의 가뭄, 여호와의 불, 여호와의 비 그리고 여호와의 승리를 아합에게 주어서 아합이 그리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셨을 것입니다. 아합은 열매만 따먹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의도 자체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악한 아합에게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나님을 따르라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경영하라고, 지금 당장의 위험은 지금 당장의 외침은 막아주겠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자신이 위험에 빠질 때에만 하나님을 이용하고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게된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라지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결국 그의 길과 하나님의 길은 달랐다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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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왕상 17:8, 9)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령을 수행한 엘리야를 살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를 맡긴 것이 아니라 까마귀와 시냇물에 그를 맡기셨다가 시돈 땅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 그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에게 보낼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에게 명령을 하였다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가 갔을 때 엘리야의 말을 사르밧 과부는 처음 듣는 것처럼 - 실제로 처음 들었습니다 - 대꾸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엘리야가 요구한 것은 단지 떡 하나이지만 그 떡 하나는 과부에게 남은 유일한 양식이었고 - 아직 가루 조금밖에 없어 요리를 해야 하지만 - 그 과부는 자식에게 그것을 먹이고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셉 시대에 애굽에서 예언되었던 가뭄이 가나안 땅에도 있었던 것처럼 북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가뭄은 시돈 땅까지 황폐하고 메마르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는 자신의 먹을 곳과 잠잘 곳이 필요했고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예비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비된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명령도, 그리고 그 엘리야의 명령 너머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의지도, 그리고수행할 수 있는 소유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르밧 과부 입장에서는 뭔 X 같은 X가 찾아와서 자신에게 하나 남은 떡을 요구하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엘리야의 명령과 엘리야의 약속을 의지하여 - 가루가 끊이지 않게 해주겠다. 즉 양식이 끊이지 않게 해주겠다 - 수중에 있는 가루를 떡으로 만들어 남김없이 엘리야에게 주게 됩니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왕상 17:10-13)
     
그런데 이 말씀을 현대에,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엘리야와 같은 사역자가 무조건 달라고 하면 성도는 아멘 하고 드려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 입장에서 보면 엘리야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양식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사역자였고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명령이니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으며 아직 생기지 않은 끊이지 않는 가루가 있다는 약속에 의지하여 단 하나 남은 양식을 주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그렇게나 떳떳하게 남은 양식 전부를 요구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성경 내용에서는 그가 왜 사르밧 과부에게 그 남은 떡을 요구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기에 그 추측을 한 번 써보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남은 양식 모두를 요구했던 것은 그 자신이 배고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엘리야는 시돈에서 만나게 된 사르밧 과부가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사르밧 과부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저는 추측이 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이전에 엘리야와 같은 행동을 했던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바로 이삭의 아내를 찾으러 갈대아 하란 땅으로 들어갔던 아브라함의 종이었습니다. 그 종은 너무나도 많은 처녀들이 물을 뜨러 왔기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선택하기가 난망하다보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중 하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자신에게 물을 주고 자신의 낙타들에게도 물을 길어 주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가 하나님과 약속한 그 약속에 의지하여 물어봤던 그 처녀가 바로 리브가였고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선택하신 이삭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가 했던 조금은 과도했던 요구는 단순히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떼를 쓴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만약 그 사르밧 과부가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엘리야는 신약 시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보내신 열두 제자들이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과 성읍에서 했던 행동처럼 발에 묻은 티끌을 털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다른 사르밧 과부를 찾으러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사르밧 과부가 맞았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 남은 음식을 달라고 하였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고 그 음식을주었으며 수 년 동안 시돈 땅에도 있었던 가뭄과 기근의 때에 엘리야와 함께 사르밧 과부 그리고 그 아들은 사르밧 과부의 믿음의 결실을 먹으면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 17: 1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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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26 11:09

    비밀댓글입니다

    • 바이블웍스로 알고 있는데.. 그 성경 프로그램 말이야... -_-...

      잘은 지내고 있는거지.. 연락 한 번 해야 하는데.. 연락하기가 힘이 드는가 보네... 기회가 되면 톡이라도 한 번 해보자고.. .^^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여로보암이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들이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그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이니라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왕상 14:1-4)
      
아시다시피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세운 이유는 종교를 새롭게 바꾸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컸습니다. 새롭게 나라를 창설하고 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자신에게 돌아온 바로 그 때 남유다보다 분명히 북이스라엘이 영토도 더 많았을 수밖에 없으며 인구도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에는 삼대 절기가 있으며 이 삼대 절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 대부분의 성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로보암은 자신으로 향했던 백성의 마음들이 남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 향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 그의마음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맞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위해서 누군가의 영토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칫 그 쪽의 왕의 회유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암살할 수도 있으며 자칫 예루살렘 성에 있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시위로 인해서 왕위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로보암 왕은 분명히 자신의 살 길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 길을 마련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가장 최악의 방법이었습니다. 금송아지를 세워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라고 말하게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의를 드리던 많은 제사장들 즉 레위 자손 중 아론의 후손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하나님 외에는 섬기려 들지 않았기에 그러한 그들을 회유하기보다는 새로운 제사장 즉 새로운 종교 가신 계급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생애에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삶을 살았을지언정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한 연민이든, 수치심이든 그에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과 왕위에서 멀어지는 것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여로보암 왕은 왕위에서 멀어지는 것을 배격했을 것이 분명하기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인 아비야가 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아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의사를 찾기에는 당시 의술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800-900년대였으니 의술이 좋았을리 만무합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신이었고 그가 믿을 수 있었던 신은 바로 자신을 왕위에 올려주었던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다쳤을 때 그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찾았던 것은 그나 그의 왕조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데 주력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면 여로보암과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금송아지가 그들 곁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신이라고 여기기보다는 백성이 신으로 여기게 하였던 것뿐이었고 그들 스스로는 내심 여호와 하나님을 더 신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그러한 신뢰 자체보다도 자신의 왕권, 자신의 영토, 자신의 앙위가 더 소중했기에 하나님을 버렸고 방치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랬기에 고대 여호와의 성지였으나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곳에 유폐가 된 걷이나 다름이 없었던 실로에 아히야가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히야는 자신을 찾아온 변장한 여로보암의 아내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인지하고서 그에게 말합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아히야는 죽을 것이고 여로보암 집안 자체가 망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기회를 주셨으며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전권 아래서 보다듬기를 바랐지만 여로보암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왕권 아래 백성을 제어했으며 자신의 왕위가 견고하도록 자신과 대적할 가능성이 있는 남유다 왕 르호보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래놓고서 자신의 아들이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마치 병만 고쳐주고 그대로 버려져 있으라는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써먹으려고 했으나 아히야도 여호와 하나님도 그러한 여로보암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멸망의 예언을 서비스로 보내줍니다.
    
다른 이스라엘 왕들과 다르게 여로보암은 아이가 죽어가자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신이라는 것, 그리고 병을 고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자신의 왕위를 위해서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찾아갔으며 하나님께로 오려고 하는 백성들의 앞을 금송아지로 막아섰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망한 것은 하나님을 신이라고 여겼지만 자신이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 자체를 막아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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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 자손을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종족을 따라 계수하되 일 개월 이상된 남자를 다 계수하라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그 명령하신 대로 계수하니라(민 3:14-16)
      
과거 레위인은 이스라엘이 해를 입은 것에 대해서 복수를 위해서 칼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모세 시대에서는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을 척살하는 전투요원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막을 지키라는 성막을 보호하라는 막중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인 이스라엘은 아직 하나님의 거룩함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당연히 그들 스스로도 거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순간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5-29)
      


빽빽한 구름 가운데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어서 모세라는 중보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아직 그들의 마음 그들의 육체,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을 이해하기도 힘이 들어서 결국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우상 만들기에 열중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둔갑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왜곡하여 섬기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은 아시기에 그들이 성막 근처로 오는 것을 철저히 막으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훼손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셨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그들이 당신의 거룩한 성막을 들어오려다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성막의 방패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방패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군세는 육십만입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복한 다음에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방벽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스라엘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믿어야만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만난 혹은 애굽에서 섬기던 이방 신들을 섬기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즉 야곱의 시대에 디나에게 이스라엘에게 욕을 보인 히위 족속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 그리고 그들이 치리하던 성읍을 몰살시켰던 레위는 모세 시대에 전혀 다른 검이 되었으며 방패가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바로 그 순간 - 정확히는 여호와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왜곡하여 섬기던바로 그 순간 - 칼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악한 세력들을 처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혹은 성막을 침범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그곳에 있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성막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두가지 방벽이 - 레위인의 역할 -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력들에게 우리가 젖어들어서 하나님을 떠나는 그러한 삶을 살지 않도록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하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시키지 말아야만 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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