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왕상 20:13, 14)
      
지금의 시리아라 할 수 있는 다메섹은 앗시리아에는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지만 한 지역의 맹주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왕권과 군세를 가지고 있는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다메섹의 왕 벤하닷이 바로 아합 왕 때부터 북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메섹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했던 때는 바아사 왕 때 남유다의 아사 왕의 뇌물을 받고 침공했던 것이 전부였을 뿐인데 아합 왕 때부터는 직접적으로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갈라먹기를 시도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메섹 왕 벤하닷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앗시리아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에 시리아나 북이스라엘까지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므리 왕 때 앗시리아에 오므리 왕이 가서 주종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았을 때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앗시리아의 편에 들어서 자신의 영토와 국가를 온전하게 하려고 했지만 앗시리아의 국력이 좋지 못한 때에 시리아는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서 북이스라엘을 쳐들어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역의 맹주로서 다메섹 왕의 목적은 단순히 북이스라엘을 자신의 휘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최대한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메섹 왕 벤하닷의 행보가 상당히 거침이 없습니다. 일단 고개 숙이고 앗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는 아합 왕 입장에서는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합 왕이 결사 항전은 어찌 보면 그것 외에는 할 것이 없어서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한 아합 왕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무명의 선지자가 다가갑니다. 사실 이 때 아합 왕 입장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때이기도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표적을 보았기에 - 여호와의 가뭄, 여호와의 불, 여호와의 비 - 그 하나님의 힘을 얻는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며 가능하면 모든 가능성을 얻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힌 아합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다가온 여호와의 선지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국력이 충분히 강하고 아합 왕이 수세가 아닌 공세였다면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두 번째 이유는 신하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요할 수 있는 상황을 조정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최근 있었던 여호와 하나님의 표적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음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엘리야를 내쫓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이세벨의 정책 그리고 뒤이어 나온 다메섹의 북이스라엘의 침입을 연결시키지 않을 신하들과 백성들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셨던 것은 당연히 이스라엘 왕 아합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합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호와의 가뭄, 여호와의 불, 여호와의 비 그리고 여호와의 승리를 아합에게 주어서 아합이 그리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셨을 것입니다. 아합은 열매만 따먹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의도 자체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악한 아합에게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나님을 따르라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경영하라고, 지금 당장의 위험은 지금 당장의 외침은 막아주겠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자신이 위험에 빠질 때에만 하나님을 이용하고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게된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라지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결국 그의 길과 하나님의 길은 달랐다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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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왕상 17:8, 9)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령을 수행한 엘리야를 살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를 맡긴 것이 아니라 까마귀와 시냇물에 그를 맡기셨다가 시돈 땅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 그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에게 보낼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에게 명령을 하였다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가 갔을 때 엘리야의 말을 사르밧 과부는 처음 듣는 것처럼 - 실제로 처음 들었습니다 - 대꾸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엘리야가 요구한 것은 단지 떡 하나이지만 그 떡 하나는 과부에게 남은 유일한 양식이었고 - 아직 가루 조금밖에 없어 요리를 해야 하지만 - 그 과부는 자식에게 그것을 먹이고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셉 시대에 애굽에서 예언되었던 가뭄이 가나안 땅에도 있었던 것처럼 북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가뭄은 시돈 땅까지 황폐하고 메마르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는 자신의 먹을 곳과 잠잘 곳이 필요했고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예비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비된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명령도, 그리고 그 엘리야의 명령 너머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의지도, 그리고수행할 수 있는 소유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르밧 과부 입장에서는 뭔 X 같은 X가 찾아와서 자신에게 하나 남은 떡을 요구하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엘리야의 명령과 엘리야의 약속을 의지하여 - 가루가 끊이지 않게 해주겠다. 즉 양식이 끊이지 않게 해주겠다 - 수중에 있는 가루를 떡으로 만들어 남김없이 엘리야에게 주게 됩니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왕상 17:10-13)
     
그런데 이 말씀을 현대에,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엘리야와 같은 사역자가 무조건 달라고 하면 성도는 아멘 하고 드려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 입장에서 보면 엘리야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양식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사역자였고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명령이니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으며 아직 생기지 않은 끊이지 않는 가루가 있다는 약속에 의지하여 단 하나 남은 양식을 주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그렇게나 떳떳하게 남은 양식 전부를 요구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성경 내용에서는 그가 왜 사르밧 과부에게 그 남은 떡을 요구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기에 그 추측을 한 번 써보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남은 양식 모두를 요구했던 것은 그 자신이 배고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엘리야는 시돈에서 만나게 된 사르밧 과부가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사르밧 과부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저는 추측이 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이전에 엘리야와 같은 행동을 했던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바로 이삭의 아내를 찾으러 갈대아 하란 땅으로 들어갔던 아브라함의 종이었습니다. 그 종은 너무나도 많은 처녀들이 물을 뜨러 왔기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선택하기가 난망하다보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중 하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자신에게 물을 주고 자신의 낙타들에게도 물을 길어 주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가 하나님과 약속한 그 약속에 의지하여 물어봤던 그 처녀가 바로 리브가였고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선택하신 이삭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가 했던 조금은 과도했던 요구는 단순히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떼를 쓴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만약 그 사르밧 과부가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엘리야는 신약 시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보내신 열두 제자들이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과 성읍에서 했던 행동처럼 발에 묻은 티끌을 털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다른 사르밧 과부를 찾으러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사르밧 과부가 맞았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 남은 음식을 달라고 하였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고 그 음식을주었으며 수 년 동안 시돈 땅에도 있었던 가뭄과 기근의 때에 엘리야와 함께 사르밧 과부 그리고 그 아들은 사르밧 과부의 믿음의 결실을 먹으면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 17: 1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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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여로보암이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들이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그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이니라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왕상 14:1-4)
      
아시다시피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세운 이유는 종교를 새롭게 바꾸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컸습니다. 새롭게 나라를 창설하고 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자신에게 돌아온 바로 그 때 남유다보다 분명히 북이스라엘이 영토도 더 많았을 수밖에 없으며 인구도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에는 삼대 절기가 있으며 이 삼대 절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 대부분의 성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로보암은 자신으로 향했던 백성의 마음들이 남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 향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 그의마음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맞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위해서 누군가의 영토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칫 그 쪽의 왕의 회유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암살할 수도 있으며 자칫 예루살렘 성에 있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시위로 인해서 왕위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로보암 왕은 분명히 자신의 살 길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 길을 마련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가장 최악의 방법이었습니다. 금송아지를 세워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라고 말하게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의를 드리던 많은 제사장들 즉 레위 자손 중 아론의 후손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하나님 외에는 섬기려 들지 않았기에 그러한 그들을 회유하기보다는 새로운 제사장 즉 새로운 종교 가신 계급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생애에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삶을 살았을지언정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한 연민이든, 수치심이든 그에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과 왕위에서 멀어지는 것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여로보암 왕은 왕위에서 멀어지는 것을 배격했을 것이 분명하기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인 아비야가 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아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의사를 찾기에는 당시 의술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800-900년대였으니 의술이 좋았을리 만무합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신이었고 그가 믿을 수 있었던 신은 바로 자신을 왕위에 올려주었던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다쳤을 때 그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찾았던 것은 그나 그의 왕조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데 주력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면 여로보암과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금송아지가 그들 곁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신이라고 여기기보다는 백성이 신으로 여기게 하였던 것뿐이었고 그들 스스로는 내심 여호와 하나님을 더 신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그러한 신뢰 자체보다도 자신의 왕권, 자신의 영토, 자신의 앙위가 더 소중했기에 하나님을 버렸고 방치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랬기에 고대 여호와의 성지였으나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곳에 유폐가 된 걷이나 다름이 없었던 실로에 아히야가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히야는 자신을 찾아온 변장한 여로보암의 아내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인지하고서 그에게 말합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아히야는 죽을 것이고 여로보암 집안 자체가 망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기회를 주셨으며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전권 아래서 보다듬기를 바랐지만 여로보암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왕권 아래 백성을 제어했으며 자신의 왕위가 견고하도록 자신과 대적할 가능성이 있는 남유다 왕 르호보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래놓고서 자신의 아들이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마치 병만 고쳐주고 그대로 버려져 있으라는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써먹으려고 했으나 아히야도 여호와 하나님도 그러한 여로보암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멸망의 예언을 서비스로 보내줍니다.
    
다른 이스라엘 왕들과 다르게 여로보암은 아이가 죽어가자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신이라는 것, 그리고 병을 고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자신의 왕위를 위해서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찾아갔으며 하나님께로 오려고 하는 백성들의 앞을 금송아지로 막아섰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망한 것은 하나님을 신이라고 여겼지만 자신이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 자체를 막아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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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 자손을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종족을 따라 계수하되 일 개월 이상된 남자를 다 계수하라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그 명령하신 대로 계수하니라(민 3:14-16)
      
과거 레위인은 이스라엘이 해를 입은 것에 대해서 복수를 위해서 칼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모세 시대에서는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을 척살하는 전투요원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막을 지키라는 성막을 보호하라는 막중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인 이스라엘은 아직 하나님의 거룩함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당연히 그들 스스로도 거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순간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5-29)
      


빽빽한 구름 가운데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어서 모세라는 중보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아직 그들의 마음 그들의 육체,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을 이해하기도 힘이 들어서 결국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우상 만들기에 열중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둔갑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왜곡하여 섬기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은 아시기에 그들이 성막 근처로 오는 것을 철저히 막으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훼손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셨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그들이 당신의 거룩한 성막을 들어오려다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성막의 방패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방패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군세는 육십만입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복한 다음에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방벽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스라엘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믿어야만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만난 혹은 애굽에서 섬기던 이방 신들을 섬기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즉 야곱의 시대에 디나에게 이스라엘에게 욕을 보인 히위 족속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 그리고 그들이 치리하던 성읍을 몰살시켰던 레위는 모세 시대에 전혀 다른 검이 되었으며 방패가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바로 그 순간 - 정확히는 여호와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왜곡하여 섬기던바로 그 순간 - 칼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악한 세력들을 처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혹은 성막을 침범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그곳에 있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성막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두가지 방벽이 - 레위인의 역할 -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력들에게 우리가 젖어들어서 하나님을 떠나는 그러한 삶을 살지 않도록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하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시키지 말아야만 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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