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왕상 20:13, 14)
      
지금의 시리아라 할 수 있는 다메섹은 앗시리아에는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지만 한 지역의 맹주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왕권과 군세를 가지고 있는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다메섹의 왕 벤하닷이 바로 아합 왕 때부터 북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메섹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했던 때는 바아사 왕 때 남유다의 아사 왕의 뇌물을 받고 침공했던 것이 전부였을 뿐인데 아합 왕 때부터는 직접적으로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갈라먹기를 시도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메섹 왕 벤하닷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앗시리아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에 시리아나 북이스라엘까지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므리 왕 때 앗시리아에 오므리 왕이 가서 주종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았을 때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앗시리아의 편에 들어서 자신의 영토와 국가를 온전하게 하려고 했지만 앗시리아의 국력이 좋지 못한 때에 시리아는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서 북이스라엘을 쳐들어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역의 맹주로서 다메섹 왕의 목적은 단순히 북이스라엘을 자신의 휘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최대한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메섹 왕 벤하닷의 행보가 상당히 거침이 없습니다. 일단 고개 숙이고 앗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는 아합 왕 입장에서는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합 왕이 결사 항전은 어찌 보면 그것 외에는 할 것이 없어서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한 아합 왕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무명의 선지자가 다가갑니다. 사실 이 때 아합 왕 입장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때이기도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표적을 보았기에 - 여호와의 가뭄, 여호와의 불, 여호와의 비 - 그 하나님의 힘을 얻는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며 가능하면 모든 가능성을 얻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힌 아합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다가온 여호와의 선지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국력이 충분히 강하고 아합 왕이 수세가 아닌 공세였다면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두 번째 이유는 신하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요할 수 있는 상황을 조정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최근 있었던 여호와 하나님의 표적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음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엘리야를 내쫓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이세벨의 정책 그리고 뒤이어 나온 다메섹의 북이스라엘의 침입을 연결시키지 않을 신하들과 백성들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셨던 것은 당연히 이스라엘 왕 아합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합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호와의 가뭄, 여호와의 불, 여호와의 비 그리고 여호와의 승리를 아합에게 주어서 아합이 그리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셨을 것입니다. 아합은 열매만 따먹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의도 자체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악한 아합에게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나님을 따르라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경영하라고, 지금 당장의 위험은 지금 당장의 외침은 막아주겠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자신이 위험에 빠질 때에만 하나님을 이용하고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게된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라지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결국 그의 길과 하나님의 길은 달랐다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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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왕상 19:1-5)

      
디셉 사람 엘리야가 북이스라엘에 가뭄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그는 홀연히 떠나버립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루 물을 찾아다니며 고생을 하였지만 그들이 더 찾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그만 찾으면 이 가뭄이 그칠 수 있을텐데 가뭄을 예언한 선지자 엘리야는 이미 사라지고 없으니 말입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찾아다녔던, 아합 왕이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엘리야는 이세벨의 고향이었던 시돈 땅에 있었습니다.
   
차마 아합 왕은 엘리야가 이세벨의 고향에 들어가서 은신하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엘리야가 그곳에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었지만 말입니다. 시간은 흘러 3년의 시간이 지나갔고 왕이 직접 물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마실 물이, 동물을 먹일 물이 북이스라엘에서는 거의 떨어지고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합 왕에게 찾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합 왕을 만나게 됩니다.
      
갈멜산에서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알로 북이스라엘을 물들인 아합 왕 앞에서 하나 남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850명의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입니다. 누구의 신이 진짜 신인가라는 대결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물론 바알과 아세라는 거짓 신이었기에 불씨 하나 송아지를 태우지 못했지만 진정한 신이자 유일한 신인 여호와 하나님은 각을 뜬 제물과 제물 사이사이를 흐르는 많은 물들을 모두 불로 핥으면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임을 만방에 선포하게 됩니다.
    
비를 내리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던 엘리야는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말의 도움을 받고 움직이는 아합 왕 앞에서 뛰어가며 엘리야는 이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북이스라엘의 모습이 멀지 않았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앞에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도륙하였고 하나님의 표적인 하나님의 불과 하나님의 비를 그들의 눈 앞에서 볼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엘리야의 생각은 순진함 그 자체였습니다.
   
아합왕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였던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불과 하나님의 비가 내렸던 사실을 이세벨에게 알렸을 때 이세벨은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는듯이 사신을 - 자객을 보낸 것이 아니라 - 보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엘리야에게 선언합니다. 엘리야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으며 무서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에 남지 못하고 남유다 지방의 가장 남쪽인 브엘세바까지 한달음에 도망을 가게 됩니다.
   
브엘세바에서 녹초가 되어 곯아 떨어진 그를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와 떡을 주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바로 그 산, 하나님의 율법을 얻게 된 바로 그 산인 호렙산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러 가라고 명령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지내며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듯이 엘리야는 광야를 사십 주, 사십 야 동안 걸어가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고 동굴에 들어가 쉼을 취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1-14)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자신 앞에 서라고 명령하셨고 산 위에 선 엘리야 앞에 강맹한 바람이 불었으나 그 바람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으며 땅 전부를 흔들어버리는 지진이 있었으나 그 속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삼키는 불이 덮쳤으나 그 안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세미한 소리가 들렸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엘리야는 하나님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 앞에 서 있게 됩니다.
      
나약하고 나약한 선지자 엘리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을 하고 하나님 안에서 열심을 내었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오는 이세벨의 살해 위협과, 북이스라엘 백성의 압박으로 인해서 북이스라엘 자체를 떠나버리고 하나님께 죽음을 요구합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더 이상 세상에서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나님께 땡강을 부립니다. 그러나 그러한 엘리야에게 아직 죽음을 허락하시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세 명의 사람을 주십니다.
  
아람의 다음 왕 하사엘, 이스라엘의 다음 왕조의 시조인 예후, 그리고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이 세 명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지만 결국 엘리야는 오직 한 명 엘리사에게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아람 왕 하사엘, 이스라엘 왕 예후에게 - 예후에게는 직접 부은 것은 아니지만 - 기름을 붓습니다. 어떻게 보면 엘리야보다 엘리사가 더 믿음이 있었고 더 담대했으며 더 용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강대한 기적을 맛본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불과 하나님의 가뭄 그리고 하나님의 비를 내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며 우리보다 어쩌면 더 나약한 사람이었찌만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순종하고 떠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엘리야였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죽음을 맛보지 않게 하고 데려간 것입니다. 나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그였기에 말입니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왕상 19: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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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왕상 18:21-24)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신이 있고 자신들만의 미래가 잇으며 자신들만의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러한 그들만의 것들이 그들을 구원해줄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의 문제 모두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때 그들은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든 해야 하는데 할 수 없는 절망감은 스스로를 절멸에 이르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오늘을 잡아라, 오늘을 즐겨라라는 말인 카르페디엠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금과옥조와 같은 격언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즐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것이 없습니다. 단순히 돈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삶의 황폐하며 생활이 메마릅니다. 좋은 것을 얻으려고 하고 자극적인 것을 얻으려 하며 쾌락을 더 선호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얻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만 가다가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갈 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엘리야 앞에 서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믿고 따랐던 풍요의 신 바알이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데 그 가뭄을 해갈시켜주는 신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비였고, 오로지 풍요였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수입해온 풍요의 신 바알은 그 역할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려고 꼭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엘리야가 누구 편에 설 지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머뭇거렸던 이유는 그래도 풍요의 신 바알을 미워해도 다시 한 번이라고 그가 비를 내리기만 한다면 다시 돌아올 생각이 있다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알이 이긴다면 그리로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명기의 복들, 즉 과거 모세가 말했던 풍요의 복들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략 육십 년의 세월동안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뭔가를 주지를 않았는데 갑자기 가뭄을 일으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았는 존재나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알에게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왕의 공포 정치로 인해서 삶이 무너져내린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풍요의 신 바알을 따르려고 하는 그 북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으로 그들에게 비를 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자신의 길이 옳다고 이야기하고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바로 그 때에 엘리야는 자신에게 호응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얼마나 바알이 풍요의 신이 헛된 신인지를 알려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특히 사역자는 하나님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정말 각자가 뜻하는대로 가려고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뿌려야 하며 그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해야만 합니다. 선량하지만 가난하고, 겸손하지만 유약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만족을 위해서,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자기들의 이익 때문이었지 권력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즉 왕의 권력과 백성들의 이익이 맞닿아져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은 버리고 풍요의 신 바알을 따랐던 것이며 우리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주님의 교회를 신경쓰지 않거나 이용하거나 버릴려고 하는 단점 투성이의 사람들을 위해서 사역자는 사역해야 하며 기도해야 하며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역자의 부족함이 있기에 사역자도 화를 내고 분노를 흘리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부족한 사역자를 통해서 영악한 사람들을 끌어모으십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 18: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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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갈멜산에 선 엘리야는 자신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옆 즉 상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신 옆에 서 있는 자들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팔백 오십 명이며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대략 육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금송아지를 택했다가 이제는 바알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정말로 유명무실해질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최대한으로 잡아서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바알을 밀었던 때를 유추해보자면 오므리 왕조의 창시자인 오므리의 12년 그리고 그리고 아합의 이십 사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이전 그 어떤 신들보다도 바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마치며 살아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가 그들의 종교를 정책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 스스로가 풍요의 신인 바알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25백년 전인 바로 그 때이기에 우리와는 종교 생활을 하는 이유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대략 백여 년 전만 해도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떠한 신이라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마저도 복을 주는 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에, 혹은 교회에 오는 것이 이득이 되기에라고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할지라도 마음 속에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인격적으로 만나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뱃지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패션처럼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젊은 사람들, 인맥 확보를 위해서 교회를 다니려고 하는 어른들까지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 안에서 우상을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나님보다 사역자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도 고민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 때의 금송아지는 출애굽을 시켜준 그들의 영도자로서 만들어낸 신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더 따르려고 하는 의지를 가졌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한낱 금송아지로 바꿔버린 그들처럼 우리도 돈으로, 인간인 그 누군가로 하나님을 치환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바로 그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해준 것이 없는데 왜 믿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갖는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요를 바라고 바알을 믿는 것처럼 재화나 물질이라고 그들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갈멜산에 모인 이유는 국왕이 소집해서 모이기도 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이스라엘에 가뭄이 생겨났는데 그 가뭄의 이유가 바로 엘리야 그리고 엘리야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기에 그들이 모인 것뿐입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왕상 18:22-24)
    
그들은 가뭄만 해갈이 된다면 바알 편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바로 그 신이 진정한 신이 아니냐라고 일갈했을 때 그들은 엘리야의 말에 찬성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릴 정도의 힘을 가진 신이라면 가뭄도 해갈시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가 지난 삼 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였기에 지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지 우연이라도 비가 한 방울이라도 왔다면 그들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경 생활의 풍요를 위해서 언제든지 금송아지든, 바알이든 여호와 하나님이든 자신들의 신을 바꿀 위인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우리에게 좀더 나은 대우를 해준다면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그 직장에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 사역자들은 그러한 유혹을 받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 그러한 유혹을 받게 되고 그 유혹에 따라 자신들을 버리고 교회를 버리며 하나님을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 자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있는 것 그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트로피인 것입니다. 갈멜산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직 엘리야 하나뿐입니다. 그러한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설령 엘리야가 아니 여호와 하나님이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린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을 사람들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믿고, 풍요로움을 꿈꾸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엘리야가 비를 내린 다음에도 쫓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가이세벨이 그를 쫓았지만 그 이상으로 그 누구도 엘리야를 보호해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비였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었으며 여호와의 선지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엘리야는 자신을 버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향해 손을 내미십니다. 함께하자라고 말입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 18: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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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장부터 16장까지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 대해서 숨가쁘게 서기관은 써내려갑니다. 누가 이 책을 지었는지. 완성했는지 - 하나님이 하셨지만 그 하나님의 계시를 영감으로 받아서 쓴 바로 그 사람은 알 수 없기에 - 한 명으로 확정짓기는 난망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흐름은 디셉 사람 엘리야가 드러나기 이전까지 숨가쁘게 달린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특히나 솔로몬 사후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이 등극한 이후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나눠지고 각자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혹은 하나님을 벗어나서 자기 멋대로 움직였는지를 묵묵히 그러나 숨가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합 왕이 16장 가장 끝 즈음에 나타납니다. 오므리 왕조의 두 번째 왕이자 오므리 왕의 아들 그리고 두로왕 시돈의 딸인 이세벨의 남편인 아합 왕은 여로보암의 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자신의 본모습을 열왕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보여줍니다.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 신을 믿는 이세벨과 함께 북이스라엘 전체를 바알의 신당으로 만들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진멸합니다. 더 이상 북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바알의 나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디셉 사람 엘리야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열왕기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
      
그리고 곧바로 엘리야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이곳 저곳으로 가서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 전체는 가뭄으로 기근이 생겨버렸고 아합 왕이 직접 나서서 엘리야를 찾아보기도 하였지만 엘리야는 온데간데 없었고 - 하나님이 숨기셨으므로 - 왕이 직접 물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살만한 세상이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이세벨을 위시한 바알의 추종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진멸하려고 더욱 광분한 상태입니다.
    


왕궁 맡은 자 오바댜가 숨겨주지 않았다면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에게는 지옥과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합 왕에게 있어 가뭄의 원인이자 기근의 근거인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로 들어선다는 것은 그리고 아합 왕 앞에 서 있는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합 왕 앞에 서라고 명령하십니다. 바로 죽을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엘리야는 따릅니다.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왕상 18:17, 18)
      
세상의 권력자인 북이스라엘의 군왕인 아합 왕이 엘리야를 만나자마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러한 아합 왕에게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시기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령하셨기에 담대히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에게 따라간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선언합니다. 가뭄이 일어나게 된 것은 아합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바알들을 따랐음이라라고 언급한 것입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아합 왕은 비가 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이자 가뭄의 원인인 엘리야를 없이하기를 소망합니다. 그 갈등의 때에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중 누가 신인지 결판을 내자고 갈멜 산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아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당연히 가뭄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적이고 아군은 한 명도 없는 바로 그곳에 갈멜산 꼭대기 한 쪽에 엘리야는 당당히 섰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단 두 장만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지를 보여줬으며 그리고 자신이 왜 가뭄을 일으켰는지 보여줬습니다. 엘리야 그는 척박하고 황폐하며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담대한 믿음과 능력을 허락하셨기에 그는 분명히 두렵고 떨렸을테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앞에서, 그리고 아합 왕 앞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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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왕상 17:8, 9)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령을 수행한 엘리야를 살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를 맡긴 것이 아니라 까마귀와 시냇물에 그를 맡기셨다가 시돈 땅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 그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에게 보낼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에게 명령을 하였다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가 갔을 때 엘리야의 말을 사르밧 과부는 처음 듣는 것처럼 - 실제로 처음 들었습니다 - 대꾸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엘리야가 요구한 것은 단지 떡 하나이지만 그 떡 하나는 과부에게 남은 유일한 양식이었고 - 아직 가루 조금밖에 없어 요리를 해야 하지만 - 그 과부는 자식에게 그것을 먹이고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셉 시대에 애굽에서 예언되었던 가뭄이 가나안 땅에도 있었던 것처럼 북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가뭄은 시돈 땅까지 황폐하고 메마르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는 자신의 먹을 곳과 잠잘 곳이 필요했고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예비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비된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명령도, 그리고 그 엘리야의 명령 너머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의지도, 그리고수행할 수 있는 소유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르밧 과부 입장에서는 뭔 X 같은 X가 찾아와서 자신에게 하나 남은 떡을 요구하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엘리야의 명령과 엘리야의 약속을 의지하여 - 가루가 끊이지 않게 해주겠다. 즉 양식이 끊이지 않게 해주겠다 - 수중에 있는 가루를 떡으로 만들어 남김없이 엘리야에게 주게 됩니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왕상 17:10-13)
     
그런데 이 말씀을 현대에,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엘리야와 같은 사역자가 무조건 달라고 하면 성도는 아멘 하고 드려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 입장에서 보면 엘리야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양식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사역자였고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명령이니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으며 아직 생기지 않은 끊이지 않는 가루가 있다는 약속에 의지하여 단 하나 남은 양식을 주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그렇게나 떳떳하게 남은 양식 전부를 요구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성경 내용에서는 그가 왜 사르밧 과부에게 그 남은 떡을 요구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기에 그 추측을 한 번 써보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남은 양식 모두를 요구했던 것은 그 자신이 배고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엘리야는 시돈에서 만나게 된 사르밧 과부가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사르밧 과부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저는 추측이 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이전에 엘리야와 같은 행동을 했던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바로 이삭의 아내를 찾으러 갈대아 하란 땅으로 들어갔던 아브라함의 종이었습니다. 그 종은 너무나도 많은 처녀들이 물을 뜨러 왔기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선택하기가 난망하다보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중 하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자신에게 물을 주고 자신의 낙타들에게도 물을 길어 주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가 하나님과 약속한 그 약속에 의지하여 물어봤던 그 처녀가 바로 리브가였고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선택하신 이삭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가 했던 조금은 과도했던 요구는 단순히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떼를 쓴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만약 그 사르밧 과부가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엘리야는 신약 시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보내신 열두 제자들이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과 성읍에서 했던 행동처럼 발에 묻은 티끌을 털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다른 사르밧 과부를 찾으러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사르밧 과부가 맞았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 남은 음식을 달라고 하였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고 그 음식을주었으며 수 년 동안 시돈 땅에도 있었던 가뭄과 기근의 때에 엘리야와 함께 사르밧 과부 그리고 그 아들은 사르밧 과부의 믿음의 결실을 먹으면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 17: 1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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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26 11:09

    비밀댓글입니다

    • 바이블웍스로 알고 있는데.. 그 성경 프로그램 말이야... -_-...

      잘은 지내고 있는거지.. 연락 한 번 해야 하는데.. 연락하기가 힘이 드는가 보네... 기회가 되면 톡이라도 한 번 해보자고.. .^^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
    
솔로몬의 학정 그리고 그에 이은 르호보암의 학정에 못이겨서 다윗 왕가와 이별하게 된 북이스라엘은 그 이후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로 인해서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 그들 스스로가 원한 것은 아닐지라도 - 여호와 하나님과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과거 족장 시대, 즉 지파들의 연합으로 이뤄졌던 사사 시대 때에는 이런 식으로 나라가 갈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겠지만 이미 남유다는 남유다대로 북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대로 각자의 행보를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시대를 폭주 기관차처럼 북이스라엘은 지나가게 됩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지 한계 끝까지 보여주고 싶다는 듯이 북이스라엘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이 들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금송아지를 넘어서서 이방 종교인 바알과 아세라가 이스라엘의 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오므리는 아들인 아합의 아내로 두로왕 시돈의 딸인 이세벨을 선택함으로서 종교 타락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 16:29-33)
    
국가 종교의 지배를 받았던 다윗-솔로몬 왕가의 전통은 남유다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스라엘 북방, 북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자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빠르게 버리고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대로 가버렸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왕위 쟁탈전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삶은 피폐할대로 피폐해졌기에 그들은 어떤 종교를 믿든간에 나라가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얻기를 바랐습니다. 그러한 그들 입장에서는 두로라는 상인들의 나라의 공주가 왕비로 들어온 것 자체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만 들어온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단지 자본만 유입이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두로를 통해서 들어온 바알 종교는 바알과 아세라는 이스라엘을 빠르게 잠식해들어갔습니다. 풍요의 신인 바알을 믿기만 한다면 한 해 농사는 잘 질 수 있다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바알이든 여호와 하나님이든 비만 제대로 오게 하고 농사만 잘 짓게 해준다면 상관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불안한 북이스라엘의 국가 정세를 지나는동안 선과 정의보다는 이득이 되는 것에 더 마음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비를 멈추게 한 이유, 가뭄을 지속하게 한 이유는 아합과 이세벨 즉 오므리 왕가 사람들을 곤경에 빠지게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풍요의 신을 섬기고 있던 북이스라엘의 백성들 아니 바알의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즉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과 손실이 되는 것 사이에 이득이 되는 것을 따지지 말라고 바알은 그들에게 이득이 될 수도 없으며 이득이 되어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의지였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더 이상 믿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시대에 하나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단지 국가 시책으로서 바알을 믿게 한 것으로 하나님을 떠난게 하니라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이득이 되기에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것이 이득이 되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버린 백성들 사이에 서서 풍요의 신 바알 그러나 거짓신에 불과한 바알이 비를 내려줄 수 없다고 바알은 헛된 신이라고 외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라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으십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을 채찍질하시며 그들에게 돌이키라고 요구하십니다. 가뭄이 수 년 동안 계속되는 것은 그들에게 또다른 재앙인데 그 재앙을 일으킨 신인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단지 성분이 물인 비를 내리시는 것 이상으로 은혜의 비를 내리시기를 원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개를 돌리게 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가뭄을 일으키시고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이킬 때까지 돌이킬 마음이 생길 때까지 아둔하게 거짓신인 바알만 쳐다보는 그들을 다시 보기 위해서 엘리야에게 선포하게 하나님은 요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뭄이 있을 것이다 말하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가뭄이 시작되었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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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 일 동안 왕이 되니라 그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 진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 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 지휘관 오므리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매 오므리가 이에 이스라엘의 무리를 거느리고 깁브돈에서부터 올라와서 디르사를 에워 쌌더라(왕상 16:15-17)
      
가나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북이스라엘은 그 많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왕권이 공고히 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여로보암 왕가나 바아사 왕가 모두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결국 2대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신하들에게 모반을 당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시작부터가 북이스라엘과 다윗 왕가의 갈등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보니 백성들의 올곧은 지지를 받기가 힘이 들었기에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 왕은 - 왕권 강화를 위해서 - 여호와 하나님의 곁을 떠나는 정책을 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남방에 벧엘 그리고 북방에 단에 제단을 세우고 금송아지를 그 위에 거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북이스라엘만의 종교를 만들어 예루살렘 성전으로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여로보암 왕은 무리수를 쓴 것이고 그 무리수는 철저힌 처벌을 대가로 받습니다.
    


바아사는 자신의 야욕에 의해서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백성의 지지 따위는 없었고 오로지 군대의 힘만이 그를 떠받치는 유일한 권력 도구였습니다. 그렇다보니 군대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었을 때 군대의 일개 장수에 불과한 시므리가 엘라를 쳐죽였을 때 그 누구도 엘라를 보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없고 백성의 지지도 없는 바아사 왕가는 이십여 년만에 그대로 사그라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므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고, 백성의 지지도 없었으며 가지고 있는 것은 한 줌도 안 되는 디르사의 병력을 - 그것도 반 밖에 안 되는 - 가지고 왕권을 지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진짜 군 병력을 가지고 있는 오므리가 디르사 즉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찾아오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결국 왕궁에다가 불을 놓고 그 안에서 자살을 하고 맙니다. 시므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것도 분명히 큰 문제이지만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그 왕권을 지킬 수 있는 전략도 없고 자신을 보호할 병력도 없는 상태에서 모반을 일으켰다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오므리는 달랐습니다. 오므리는 블레셋의 성읍 깁브돈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그곳에 있다가 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곧바로 수도로 쳐들어와 전광석화처럼 수도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시므리가 자살할 수밖에 없도록 압박을 가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왕을 선포하기보다는 자신의 적대 세력인 디브니의 세력들을 쳐부수는 것도 성공하게 되는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오므리는 시므리와 달리 왕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적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 알고 있는 것을 시행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십이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 16:23-26)
     
왕이 된 오므리는 수도를 디르샤에서 사마리아로 옮겨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고 자신의 아들 아합의 아내로 두로의 공주 이세벨을 불러들여 외교를 공고히 했으며 군대의 지지를 받고 있어 북이스라엘의 혼란을 단번에 잠재우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적어도 북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오므리 왕의 출연은 환영할만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므리 왕조는 바아사 왕조나 여로보암 왕조보다 분명히 더 안정된 삶을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다고 봅니다. 여리고 성을 아합이 왕이었을 때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가 안정되었다는 증거였으니 말입니다.
    


물론 여리고 성의 건립을 이전 그러니까 사울 왕, 다윗, 솔로몬 왕이었을 때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호수아의 저주가 서려 있기 때문이기에 벧엘 사람히엘이 여리고 성의 건립을 시도하게 된 것은 과거 여호수아의 저주가 이제는 흐릿해졌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더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이북이스라엘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아합이 왕이었을 때는 바알과 아세랑 신앙이 북이스라엘 전국을 휩쓸었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이 그 안에서 살아남기는 분명히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시므리와 오므리의 차이점은 시므리는 모반하여 왕이 되기 이전에 자신이 왕의 위치를 감당할 수 있는 세력이 있는지, 군대가 있는지, 백성의 지지가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아둔한 자였다는 것에 비해 오므리는 백성의 지지를 받아 - 반 쪽이기는 하지만 -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바로 그 때부터 어떤 식으로 해야 왕이 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전략 전술과 병력 기동을 전광석화처럼 해내어 수도에서 왕이 된 시므리를 자살하게 만들고 자신의 대적인 디브니를 붕괴시켜버립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왕으로서 사마리아로 도성을 옮겨 - 왕궁이 불탔기 때문에 -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둘의 같은 점은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에 집착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방법 중 가장 저열하고 엄혹한 모반과 전쟁을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왕권 쟁탈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오므리의 아들 아합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사라져서 엘리야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상 16: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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