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머물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1-5)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받는 핍박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해 합니다. 그리고 그 민감함은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향한 그 압박을 거두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어지게 되고 간혹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처벌을 받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의 본심은 아니겠지만 감정적으로 심히 동요하게 되면 그러한 말들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특히나 사역자들은 더 많은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고 더 많은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으나 아직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집트를 탈출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당도하는 요단강을 앞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신실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고 그들을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막아서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 온전히 자신의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먹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언제나처럼 모세와 아론만 비난합니다. 자신들이 광야에서 떠돌게 된 것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부모 세대의 불순종 때문이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언제나처럼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로지 모세와 아론이 잘못 인도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40년 동안 언제나처럼 한결같이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20장 1절에 38년만에 가데스에 다시 돌아온 그들은 민수기 20장 14절부터 정복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를 벗어나 실질적인 여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므리바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와 아론에게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절제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정결례와 같은 의례를 허락하셔서 자신들과 화해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또다시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먹을 것, 마실 것만을 찾는 구태의연한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민 20:6-9)
      
딱 한 번만 더 참으면 되는데 모세와 아론은 참지 못했습니다. 40년 동안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아서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받지 않도록 방벽이 되었었는데 므리바 물 사건에서는 처음으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를 내고 분노를 발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감정을 표출하는데 바빴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딱 한 번입니다. 그 이전에는 그런 적이 모세와 아론에게는 없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적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딱 한 번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의 분노,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리는 그들의 행위에 진노하셨고 그들에게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미리암이 죽었던 바로 그 때에 아론과 모세도 곧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만큼 충격적인 하나님의 선언이셨으며 선포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지속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하지만 단 한 번의 실패, 단 한 번의 잘못은 그가 가나안 땅에 발을 딛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존재들,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자신들을 끊임없이 돌보아야 하며 돌아봐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줘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역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보이라고 말입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보이지 않으면 정말로 조그마한 죄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죄를 짓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혹은 하나님을 믿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하시는 처벌보다도 더 혹독하게, 더 엄혹하게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자들이 당신의 거룩함을 보이기를 원하시며 당신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죄로, 그들의 범죄로, 그들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가리게 가만히 두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목숨을 건 사람들, 사역자들, 교역자들, 목회자들은 좀더 하나님의 말씀에, 거룩함에 민감해야 하며 자신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 믿음에 연약한 자들에게 받는 대우에 민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3-27)
          
사역자들은 사람들이 주는 스트레스, 사람들이 주는 압박, 사람들에게 받는 칭찬, 사람들에게 받는 대우에 민감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민감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참 능력으로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사역자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들의 부족함을 이해하며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매 순간 공급을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 낮아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역자들이 더 교만해질 수 있으며 사역자들이 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믿음이 연약한 바로 그 사람들보다도 더 쓴뿌리를 내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의 거룩함을 제대로 보이지 못한 사역자들에게 행하시는 그 심판을 바로 사역자들에게 내리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했던 그 모든 수고는 정작 그 수고한 사역자와는 상관없는 것들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삶을 매일 해야만 합니다. 스스로 낮아질 수 있도록, 높아지거나 교만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만 합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다윗이 대적자에게 빌미거리를 만들듯이 사역자들도 시비거리를 만들게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지 못하였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민 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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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과거 1992년 재림 광풍이 불었던 때에 당시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시한부 종말론주의자 한 명의 말이 아직도 마음에 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혹시나 오시면 그 분을 만나뵙고 10월 28일에 오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라고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앙관은 양쪽 모두에 발을 디디고 있다가 하나가 틀리면 다른 하나로 자리를 이동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였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었고 그는 다시 발을 옮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험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믿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죽음 이후를 준비하고 삶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경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믿지 않는 사람들 중 일부는 믿는 그리스도인, 경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권유합니다. 세상의 것을 같이 누리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방법은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19-24)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양자 택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돈을 섬기는 것, 세상의 가치를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함께 갈 수는 없습니다.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둘 다를 모두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우리를 부르셨을 때 우리에게 생명과 사망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세상의 가치, 세상의 판단을 더 먼저 따지고 하나님을 그 다음으로 따져서는 구원을 얻을 수도 없으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사역했을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 율법 주의자들에게 혹 했던 이유는 두 가지 정도 됩니다. 하나는 로마인들은 종족 신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지만 종족을 불문하고 퍼지는 신들에 대해서는 인정해주지 않으며 그러한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황제도 같이 숭배해야만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종족신들을 믿는 사람들도 황제를 숭배해야 하지만 야훼를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러한 특혜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특혜는 비단 팔레스타인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로마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주는 특혜라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1, 12)
      
그렇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하게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유대인이 되는 것을 선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할례를 받기만 한다면 유대인으로서 적을 올리게 되면 고난을 받을 필요 없이 그리스도를 마음껏 섬길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도했던 바나바도 그리고 바울도 유대인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꼼수를 통해서 피해보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에서 시키는 것을 하는 것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영민하게 꾸릴려고 한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율법적으로 즉 제의를 드리고,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 즉 그들은 세상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확신이 없었기에 자신의 몸에 새기는 것으로 그 확신을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정말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인가 확신이 부족하여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확신 꺼리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6-9)
     
방언은 분명히 우리에게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유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과거 미국의 오순절 교단의 일부 사람들은 방언을 받는 것이 구원의 한 증거라고 믿기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에 눈에 보이는 증거 즉 방언을 하는 것으로 그 증거를 삼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은 사람들 즉 방언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증거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방언은 선한 것입니다. 방언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언이 하나님을 믿는 그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방언이 그 근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바로 그 믿음이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수많은 위험과 위협 그리고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한 위험과 위협 그리고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갑옷으로 우리 자신을 둘러싸게 되는데 그러한 갑옷이 가끔은 우리의 숨을 막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저는 인정받은 유대인이라는 감투를 쓰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할례를 통해서 얻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핍박을 피하려 하지말고,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다른 것에서 찾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며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 이끄는 단 하나의 필요충분 조건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세상의 방법, 그 어떤 이단의 방법을 하나님을 믿는 주요 조건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주요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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