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행 13:1-5)
    
안디옥 교회는 이미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믿는 교회로서는 가장 성공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인원만 많이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어 그 교회 성도들을 섬기는 마음을 가득히 가지고 있는 교회이며 전도단을 세워 다른 도시로 선교 여행을 떠나게 할 수 있는 후원의 마음과 후원의 욕심이 있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에 전도를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명령하셨고 금식하고 기도한 이후에 그 두 사람은 기도의 동역을 받을 것을 확신받고 1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1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 두 사람은 성령의 보내심을 따라서 구브로 즉 키프로스 섬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이후 전도 여행의 패턴은 거의 비슷한데 그들이 어떤 도시든 들어가게 되면 그곳에서 먼저 회당을 찾아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며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그곳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전하든 전하지 않든 간에 그들은 에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전혀 힘쓰는 전도자들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의 파송을 받아 전도하게 된 것은 그들이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그들 이전에도 전도자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 이전에도 교회의 파송을 받았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도자 빌립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로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로 가서 말씀을 전하고 성령의 능력을 행했으며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됨을 알게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여 성령의 일하심을 그곳에서도 나타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마가 요한을 파송한 껀은 성령님께서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사람을 세우라고 명령하셨고 기도로 그들을 파송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마가 요한은 키프로스 섬을 시작으로 하여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들의 복음 전도 사역이 무조건 순풍을 달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일이 엄청난 장애물을 만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키프로스 섬을 횡단하면서 복음 사역에 치중하였으며 그들의 사역은 키프로스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을 만나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행 13:6-10)
      
바예수는 서기오 바울 곁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을 막아서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마술사라는 정체성이 있는데 그는 말씀 사역을 방애하는 외부적인 요인입니다. 주의 사역을 하다보면,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종종 외부적인 요인, 장애물로 인해서 우리가 사역을 하는데 방해를 받으면 우리는 둘 중 하나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 외부 요인을 피해가는 것 혹은 그 외부 요인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복음서에 보면 씨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 비유 중에 가시덤불 속에 빠진 씨앗 비유가 있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보다 주의 사역보다 외부적인 요인 즉 환경적인 요인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유혹에 말씀이 막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외부적인 요인이었던 바예수를 말씀으로 쳐서 물리쳤던 것처럼 우리도 외부적인 요인이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단호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행 13:13, 14)
      
바예수를 물리치고 서기오 바울에게 말씀을 전하는데 성공한 바울과 바나바는 키프로스 섬에 머물지 않고 지중해 북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와중에 수행원이었던 마가 요한은 전도 여행을 중도에 그만두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함께하던 사람이 떠나가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우리의 사역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할 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낙망하게 됩니다. 욥이 가장 힘들 때는 그의 아내가 그를 저주하였을 때이며 또한 그의 친구들이 그를 이해해주지 않을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우리를 핍박할 때보다도 우리를 아는 우리의 가장 친한 사람이 우리에게 발뒤꿈치를 들었을 때, 우리를 이해해주지 않을 때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이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요한의 떠남에도 불구하고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들어가 앉아 말씀을 준비한 것처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의 사역을 그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혹은 같이 사역했던 사람이 멈추자고 하더라도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앉아서 마가 요한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의 나라와 주의 의, 그리고 복음 전도였지 자신을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주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처럼 세상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며 가장 친한 친구의 떠나감보다도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는 우리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장애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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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19-21)
      
사도행전 7장 마지막에 사울이 등장한 뒤에 사도행전의 흐름은 사울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병행하여 처리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는 이야기와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 남방 광야에서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난 이야기를 병치시킨 다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게 예수님을 만남 그리고 아나니야에게 침례를 받고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소로 간 이야기와 베드로의 룻다와 욥바 전도 이야기를 병치시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오로지 사도 베드로와 고넬료 이야기만을 꺼내는데 바로 11장에서는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내에서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갈등이 봉합되는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안디옥 교회가 설립되는 배경을 보여주더니 그곳에 사울이 바나바와 함께 참여하게 되는 사연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후에 나오겠지만 실질적으로 베드로는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죽임을 당하려다가 천사에게 구함을 받고 떠나는 것으로 사도행전에서 주목받을만한 행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 행전과 바울 행전으로 나눠진다라고 내용 분석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실질적으로 7장부터 12장까지가 이들의 교차가 이뤄지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이 주장하고 있는 사도들의 행전이 예수님의 명령이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바로 그 말씀에 부합하도록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선교가 이뤄졌다면 땅끝까지는 바로 바울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2-26)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바울의 선교는 결국 베드로의 고넬료와의 만남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 설득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안디옥 교회에서 헬라인들을 전도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생겼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이들을 추인해줄리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본문 구절을 통해서 사도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역할이 작지 않다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도 결국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것이며 바나바가 바로 그 사울 즉 바울을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온 것이기에 안디옥 교회와 사울의 사도행전 후반의 약진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지를 기반으로 된 것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지는 사도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더 나아가 사도 베드로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환상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렇기에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같은 선상에 서 있는 사도이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을 사도 베드로가 지지해주었다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에게 할례를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있었던 사도 베드로는 사도 바울을 지지하면서 10장에 있었던 환상에 대해서 다시 언급합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과 자신이 그리스도인 됨을 언급하기 위해서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듯이 말입니다. 누가의 사도행전은 이렇듯 전반부에 언급된 사도 베드로의 그림자가 사도 바울의 전도 역사 내내 어느 정도는 짙게 깔려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인 선교를 공식적으로 추인하게 되는 지난 11장 상반부에 이어서 실질적으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중추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게 되고 그 자리에 바나바와 사울이 사역자로서 위치해 있음으로 해서 실질적으로 로마-그리스 문화권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퍼지게 되는 역사를 누가는 밀도 있게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협력으로 -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 이방인 선교의 문이 드디어 열린 것입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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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행 10:26-29)
      
바울은 급진적인 사람입니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으로 있었을 때에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그 스스로 언급하기를 가장 엄한 전통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한 그가 유대교를 믿는 방식은 급진적이면서도 저돌적이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스데반이 죽을 때에 찬성한 사람이며 대제사장의 제가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었으며 다메섹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그리로 몸소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고 명하시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들었을 때에 그는 3년 동안 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에 다메섹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것도 사정을 보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정을 보지 않고 전하며 수많은 토론에서 승리하여 이겼습니다. 그로 인해서 다메섹에서도 죽을 뻔 하였던 그는 예루살렘에서도 죽을 뻔 하여 다소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러한 바울과 다르게 베드로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표적을 보이기도 하고 말씀을 전하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는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합니다. 성전 관리자와 대제사장들이 그와 요한을 불렀을 때에 그는 그리스도인들 앞에 서서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고 죽음을 무릎 씁니다. 분명히 과격하기도 하고 급진적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지도자로서 품격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모두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을 때에도 그는 예루살렘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남아 있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도 말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베드로의 사도행전의 모습은 복음서의 베드로의 모습과 상당히 많이 대조됩니다. 일단 지르고 보는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실 때에 자기도 걷게 해달라고 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라는 예언에 그러지 말라고 예수님께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에 자신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 있고 행동보다도 괄괄한 성미가 더 돋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다릅니다.
      
복음서에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는 사람이었으나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그는 교회가 부르면 가고 그리스도인들 즉 제자들이원하면 찾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면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런데 그는 들나귀처럼 좌충우돌하는 사도 바울과 다르게 좀더 진중합니다. 지도자로서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며 지도자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비록 바울에게 책망을 들었지만 제자들간의 알력들에서 함부로 한 쪽 손을 들어주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뱃사공으로서 선머슴의 모습으로 있었던 예수님이 계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데리고 다니시는 것으로 그와 함께하셨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당시 로마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로서 베드로는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지만 경계를 넘어서며 선을 지나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자신을 믿고 자신을 의지하는 예루살렘 교회와 로마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도 베드로의 직임을 삼위일체 하나님은 알고 계셨기에 그를 차근차근 선을 넘을 수 있는 단계까지 이끌어 주시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사도 베드로가 선을 넘는다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로마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선을 넘는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을 넘는 과정을 상당히 밀도 있게 그려나가십니다. 고넬료에게 임하신 하나님, 사도 베드로에게 임하신 하나님이 로마 세계의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넘는 과정을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 선을 넘을 때까지 긴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당시의 사도 바울 그리고 과거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의 자신처럼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한 번 더 확인을 합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불법임을 알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정하다 하시는 것을 자신이 부정하다 할 수 없어서 왔다고 말하며 왜 자신을 불렀는지에 대해서 한 번 더 확인을 합니다. 확인이 마쳐진 후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즉 복음을 고넬료에게 전했고 그곳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게 되자 그 때에야 비로소 이방인인 고넬료 집안 사람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기로결정을 합니다.
    
지도자가 선을 넘는 것이 힘이 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과정을 묵묵히 가야 하는 이유는 지도자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까지도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사도 베드로 혼자였다면 베드로는 더 많이 질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지도자로서의 품격, 지도자로서의 무게감을 온전히 가지고서 한 걸음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기 이전과 만난 이후로 세상이 변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침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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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머물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1-5)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받는 핍박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해 합니다. 그리고 그 민감함은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향한 그 압박을 거두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어지게 되고 간혹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처벌을 받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의 본심은 아니겠지만 감정적으로 심히 동요하게 되면 그러한 말들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특히나 사역자들은 더 많은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고 더 많은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으나 아직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집트를 탈출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당도하는 요단강을 앞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신실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고 그들을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막아서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 온전히 자신의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먹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언제나처럼 모세와 아론만 비난합니다. 자신들이 광야에서 떠돌게 된 것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부모 세대의 불순종 때문이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언제나처럼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로지 모세와 아론이 잘못 인도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40년 동안 언제나처럼 한결같이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20장 1절에 38년만에 가데스에 다시 돌아온 그들은 민수기 20장 14절부터 정복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를 벗어나 실질적인 여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므리바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와 아론에게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절제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정결례와 같은 의례를 허락하셔서 자신들과 화해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또다시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먹을 것, 마실 것만을 찾는 구태의연한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민 20:6-9)
      
딱 한 번만 더 참으면 되는데 모세와 아론은 참지 못했습니다. 40년 동안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아서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받지 않도록 방벽이 되었었는데 므리바 물 사건에서는 처음으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를 내고 분노를 발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감정을 표출하는데 바빴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딱 한 번입니다. 그 이전에는 그런 적이 모세와 아론에게는 없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적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딱 한 번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의 분노,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리는 그들의 행위에 진노하셨고 그들에게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미리암이 죽었던 바로 그 때에 아론과 모세도 곧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만큼 충격적인 하나님의 선언이셨으며 선포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지속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하지만 단 한 번의 실패, 단 한 번의 잘못은 그가 가나안 땅에 발을 딛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존재들,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자신들을 끊임없이 돌보아야 하며 돌아봐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줘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역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보이라고 말입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보이지 않으면 정말로 조그마한 죄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죄를 짓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혹은 하나님을 믿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하시는 처벌보다도 더 혹독하게, 더 엄혹하게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자들이 당신의 거룩함을 보이기를 원하시며 당신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죄로, 그들의 범죄로, 그들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가리게 가만히 두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목숨을 건 사람들, 사역자들, 교역자들, 목회자들은 좀더 하나님의 말씀에, 거룩함에 민감해야 하며 자신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 믿음에 연약한 자들에게 받는 대우에 민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3-27)
          
사역자들은 사람들이 주는 스트레스, 사람들이 주는 압박, 사람들에게 받는 칭찬, 사람들에게 받는 대우에 민감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민감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참 능력으로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사역자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들의 부족함을 이해하며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매 순간 공급을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 낮아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역자들이 더 교만해질 수 있으며 사역자들이 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믿음이 연약한 바로 그 사람들보다도 더 쓴뿌리를 내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의 거룩함을 제대로 보이지 못한 사역자들에게 행하시는 그 심판을 바로 사역자들에게 내리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했던 그 모든 수고는 정작 그 수고한 사역자와는 상관없는 것들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삶을 매일 해야만 합니다. 스스로 낮아질 수 있도록, 높아지거나 교만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만 합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다윗이 대적자에게 빌미거리를 만들듯이 사역자들도 시비거리를 만들게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지 못하였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민 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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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과거 1992년 재림 광풍이 불었던 때에 당시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시한부 종말론주의자 한 명의 말이 아직도 마음에 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혹시나 오시면 그 분을 만나뵙고 10월 28일에 오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라고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앙관은 양쪽 모두에 발을 디디고 있다가 하나가 틀리면 다른 하나로 자리를 이동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였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었고 그는 다시 발을 옮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험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믿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죽음 이후를 준비하고 삶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경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믿지 않는 사람들 중 일부는 믿는 그리스도인, 경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권유합니다. 세상의 것을 같이 누리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방법은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19-24)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양자 택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돈을 섬기는 것, 세상의 가치를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함께 갈 수는 없습니다.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둘 다를 모두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우리를 부르셨을 때 우리에게 생명과 사망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세상의 가치, 세상의 판단을 더 먼저 따지고 하나님을 그 다음으로 따져서는 구원을 얻을 수도 없으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사역했을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 율법 주의자들에게 혹 했던 이유는 두 가지 정도 됩니다. 하나는 로마인들은 종족 신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지만 종족을 불문하고 퍼지는 신들에 대해서는 인정해주지 않으며 그러한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황제도 같이 숭배해야만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종족신들을 믿는 사람들도 황제를 숭배해야 하지만 야훼를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러한 특혜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특혜는 비단 팔레스타인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로마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주는 특혜라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1, 12)
      
그렇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하게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유대인이 되는 것을 선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할례를 받기만 한다면 유대인으로서 적을 올리게 되면 고난을 받을 필요 없이 그리스도를 마음껏 섬길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도했던 바나바도 그리고 바울도 유대인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꼼수를 통해서 피해보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에서 시키는 것을 하는 것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영민하게 꾸릴려고 한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율법적으로 즉 제의를 드리고,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 즉 그들은 세상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확신이 없었기에 자신의 몸에 새기는 것으로 그 확신을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정말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인가 확신이 부족하여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확신 꺼리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6-9)
     
방언은 분명히 우리에게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유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과거 미국의 오순절 교단의 일부 사람들은 방언을 받는 것이 구원의 한 증거라고 믿기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에 눈에 보이는 증거 즉 방언을 하는 것으로 그 증거를 삼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은 사람들 즉 방언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증거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방언은 선한 것입니다. 방언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언이 하나님을 믿는 그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방언이 그 근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바로 그 믿음이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수많은 위험과 위협 그리고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한 위험과 위협 그리고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갑옷으로 우리 자신을 둘러싸게 되는데 그러한 갑옷이 가끔은 우리의 숨을 막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저는 인정받은 유대인이라는 감투를 쓰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할례를 통해서 얻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핍박을 피하려 하지말고,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다른 것에서 찾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며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 이끄는 단 하나의 필요충분 조건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세상의 방법, 그 어떤 이단의 방법을 하나님을 믿는 주요 조건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주요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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