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수령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민 30:1, 2)
        
스파이더맨 트릴로지가 있습니다. 지금의 마블 유니버스의 스파이더맨 홈커밍이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과 전혀 다른 그 이전의 스파이더맨 영화로서 그 가능성을 보여주어 아이언맨으로부터 시작된 마블 유니버스의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동력을 준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스파이더맨의 주인공 피터 파커의 말이 있는데 사실은 그의 잘못으로 죽게 된 그의 삼촌이 그에게 한 말이기도 합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피터 파커는 자신이 원해서 그 힘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연의 산물이었기에 그는 그 힘을사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그는 너드였으며 왕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 힘을 얻게 된 그는 자신을 왕따시키는 학교 친구들을 골탕먹이기도 하고 돈벌이를 위해서 밤에 사설 링에서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삼촌은 그를 설득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큰 힘을 얻었다면 큰 책임을 져야만 한다라고 말입니다.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피터 파커는 그의 삼촌의 죽음 이후에 알게 됩니다. 자신이 한 행동, 자신이 만들어낸 일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이 잘못 행동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주변 사람들부터 많은 사람들까지 많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 힘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힘을 얻게 되면 많은 것을 이룰 것이라고, 많은 것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알아야 합니다. 힘을 얻게 된다라는 것은 그만큼 가지고 있어야 하는 책무가 많을 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돈이 많은 부자들이 지탄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이 향유할 수 있는 수많은 권리들, 권한들은 누리면서 그들이 해야만 하는 혹은 그들이 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책무들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하는 품격들을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기에대중이 그들에게 혹독한 시선을 주게 됩니다. 많은 언론들은 기업가 혐오 주의에 대해서 말을 하지만 그러나 기업가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에 많은 책무를 가져야 한다라는 사실들을 그들이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들은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기원전 1500년 전에 있었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서원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서원을 할 때 조심히 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원을 했다가 그것을 이루지 않는 사람에게 죄없다 하지 않으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외 사항을 말하십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고 서원을 했다가 그의 아버지가 알아서 그 서원을 백지화 시키면 하나님께서 서원을 했던 여성의 죄를 묻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또한 결혼을 한 여성이 남편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서원을 했다가 남편이 그것을 알고 백지화 시키면 서원을 했던 여성의 죄를 묻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특권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를 이해하시고 인정하셨던 하나님께서 여성들의 권한 자체가 상당히 제약되어 있기에 그들의 의무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명의 성인이라고 한다면 그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투표권이 있으며 스스로의 신상과 관련한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금의 우리들이라고 한다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서원을 했다고 한다면 그 서원을 이뤄야만 합니다. 아버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고 남편과 아버지가 백지화시킨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사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릅니다. 권한과 권리가 있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책무와 의무가 있다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권리와 권한만 달라고 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발상은 없다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할 것입니다. 권리와 권한을 달라고 하려면 그에 따르는 의무와 책무를 하겠다는 결심이 스스로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를 인정받고 싶다면 우리는 그에 따르는 책무와 의무를 다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소속되어 있으려면 백성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 우리는 한 명의 오롯한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또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일이나 스스로 결심하려고 한 일이 있다고 하자 그의 아버지가 그의 서원이나 그가 결심한 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의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가 결심한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의 서원과 결심한 서약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결심한 서약을 경솔하게 그의 입술로 말하였으면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고 그 듣는 날에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을 이행할 것이요 그가 결심한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그러나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결심하려고 경솔하게 입술로 말한 서약은 무효가 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민 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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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민 24:1-4)
          
발람이 하나님의 뜻보다도 세상의 재리에 눈이 돌아가면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했던 그 날 밤 그리고 그 이후에 있었던 여호와의 사자와의 만남 이후 발람은 완전히 굴복되어졌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을 돌리려고 하는 그의 모든 행동은 더 이상 빛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고 발락이 앞에 있더라도 발락이 자신에게 줄 재물이 앞에 있더라도 그는 더 이상 그 재물에 눈이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들고 언제든지 - 발락이 앞에 있든 없든 - 자신을 죽일 수 있다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하나님의 뜻을 여러 나라에 전하게 될 때 그는 점술을 사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발락의 이스라엘 저주 요청 건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실 말씀을 전하기 위할 때에도 점술을 통해서 두 번의 예언을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의지를 무너뜨리시고 그에게 자신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대로 말하라고, 예언을 하라고 요구를 하셨으며 발람은 그 요구에 따르게 됩니다. 아무리 발람이라 하더라도 죽음은 무서우니 말입니다.
      
세 번째 예언을 하게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발락이 하나님을 설득해보라고, 하나님의 생각을 돌리라고 한 바로 그 때 발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점술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에게 감싸여져 있는 상태,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충만해진 상태였기에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세 번째 예언은 이전의 두 예언보다도 더 극적이었는데 그것은 예언을 대언하는 통로인 발람이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온전히 충만해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졌다고 해서 발람이 온전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많이 어렵습니다. 이후의 그의 행보 즉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서 행했던 그의 행악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충만해 있던 그가 왜 그렇게 변했을까요. 결국 그는 자신에게 온 그 유혹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의지를 행동으로 구현해야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4-18)
    
공관병에게 행한 갑질 문제로 비난을 받고 있는 박찬주 대장과 그 부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중직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한 행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가혹한 일들뿐이었습니다. 교회 내에서는 분명히 존경받고 인정받았던 중직이었을텐데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사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그러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사람의 죄성은 정말로 놀라워서 죄성대로 사람이 흐르게 되면 순식간에 악마가 되어버립니다.
    


그들은 특히 박찬주 대장 부인은 자신이 한 행동이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어떠한 중범죄를 저질렀는지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니까라고 생각하고 그냥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가혹하게 몰아가는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최소한의 신앙은 그의 삶 속에서는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박찬주 대장 부인은 불교인이었던 공관병을 억지로 교회로 데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러한 행동 그 자체가 얼마나 교회를, 그리스도를 더럽히는 행동이었는지 전혀 알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발람이 한 번 하나님의 영에 감화받았다고 해서 그의 삶이 나중에까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중직을 맡는다고 혹은 예배 시간에 찬양 시간에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올라온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닌가는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향기가 품어져 나오는가 썩은내가 나오는가로 판단되어질 수 있습니다. 발람이 한 번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서 옳은 예언을 하였지만 그 이후에는 그렇지 않은 행보를 보여주었습니다.
      


교회에서만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냥 그대로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악한 길로 빠지게 됩니다. 그 쪽이 훨씬 쉽고 편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단지 재물의 이득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이득, 즐거움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제지를 받지 않고 성령으로인해 제어를 받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세상 앞에서 악인으로 전락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좁은 길, 넓은 길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넓은 길을 가게 되면 언제든지 그렇게 스스로를 죄악에 노출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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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과거 1992년 재림 광풍이 불었던 때에 당시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시한부 종말론주의자 한 명의 말이 아직도 마음에 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혹시나 오시면 그 분을 만나뵙고 10월 28일에 오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라고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앙관은 양쪽 모두에 발을 디디고 있다가 하나가 틀리면 다른 하나로 자리를 이동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였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었고 그는 다시 발을 옮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험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믿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죽음 이후를 준비하고 삶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경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믿지 않는 사람들 중 일부는 믿는 그리스도인, 경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권유합니다. 세상의 것을 같이 누리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방법은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19-24)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양자 택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돈을 섬기는 것, 세상의 가치를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함께 갈 수는 없습니다.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둘 다를 모두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우리를 부르셨을 때 우리에게 생명과 사망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세상의 가치, 세상의 판단을 더 먼저 따지고 하나님을 그 다음으로 따져서는 구원을 얻을 수도 없으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사역했을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 율법 주의자들에게 혹 했던 이유는 두 가지 정도 됩니다. 하나는 로마인들은 종족 신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지만 종족을 불문하고 퍼지는 신들에 대해서는 인정해주지 않으며 그러한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황제도 같이 숭배해야만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종족신들을 믿는 사람들도 황제를 숭배해야 하지만 야훼를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러한 특혜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특혜는 비단 팔레스타인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로마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주는 특혜라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1, 12)
      
그렇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하게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유대인이 되는 것을 선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할례를 받기만 한다면 유대인으로서 적을 올리게 되면 고난을 받을 필요 없이 그리스도를 마음껏 섬길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도했던 바나바도 그리고 바울도 유대인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꼼수를 통해서 피해보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에서 시키는 것을 하는 것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영민하게 꾸릴려고 한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율법적으로 즉 제의를 드리고,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 즉 그들은 세상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확신이 없었기에 자신의 몸에 새기는 것으로 그 확신을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정말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인가 확신이 부족하여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확신 꺼리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6-9)
     
방언은 분명히 우리에게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유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과거 미국의 오순절 교단의 일부 사람들은 방언을 받는 것이 구원의 한 증거라고 믿기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에 눈에 보이는 증거 즉 방언을 하는 것으로 그 증거를 삼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은 사람들 즉 방언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증거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방언은 선한 것입니다. 방언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언이 하나님을 믿는 그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방언이 그 근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바로 그 믿음이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수많은 위험과 위협 그리고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한 위험과 위협 그리고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갑옷으로 우리 자신을 둘러싸게 되는데 그러한 갑옷이 가끔은 우리의 숨을 막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저는 인정받은 유대인이라는 감투를 쓰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할례를 통해서 얻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핍박을 피하려 하지말고,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다른 것에서 찾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며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 이끄는 단 하나의 필요충분 조건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세상의 방법, 그 어떤 이단의 방법을 하나님을 믿는 주요 조건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주요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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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 19)
     
지금도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이 원래 다녔던 교회에서 사역하기보다는 다른 교회로 떠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원래 다녔던 교회가그에게 맞지 않았던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원래 다녔던 교회는 그를 사역자로 대우하기보다는 그를 어린 아이로 대우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사역자가 사역자로서 기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가지 것 중 하나가 바로 성도의 지지인데 그를 어린 아이로 볼 수 있는 성도들이 다수라고 한다면 다른 교회로 떠나는 것이 더욱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라났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서 그곳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도 아무리 병든 자들을 고친다 하더라도 - 소소히 고쳤다라는 기록이 다른 복음서에는 있습니다 - 그를 그들은 메시아로 보기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소년 예수, 가족이 자신들과 함께 있기에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그를 바라보기 힘들었습니다. 나사렛에서 그는 단지 목수 예수였을 뿐이며 메시아로서 병든 자를 치료하는 존재로서의 예수는 그들에게 생소했으며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나사렛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보았으며 목수였던 예수를 보았던 나사렛 동네 사람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려고 하지 않았고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그들을 구원할 존재로서, 인자로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를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을 뿐 예수를 돌로 치려는 시도를 처음부터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동향 친구나 다름이 없는 예수를 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 4: 25-27)
    
나사렛 사람들을 포함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카비 혁명에 뒤이었던 하스모니아 왕조가 로마에 굴복하게 되었고 이방인인 헤롯의 왕조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이스라엘에 메시아가 도래하여 로마를 격파하고 헤롯 왕조를 멸절시킬 것이라 그들은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라고 있었던 메시아는 자신들 틈에 있었던 목수 예수가 아니라 천군 천사를 지휘하며 하늘ㅇ에서 강림하는 군사령관이자 하나님의 사자인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음으로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라고 선포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구휼을 받았던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과부, 엘리사 시대에 나병을 고침받았던 수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나 혐오하던 이방 사람들이었는데 그러한 이방 사람들이 구원받았던 것과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나사렛 사람 더 나아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경고에 나사렛 사람들은 분기탱천합니다. 감히 선민인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저주하는(응?) 예수를 그들은 절벽으로 끌고가서 죽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소망을 버리라고 촉구하는, 자신들이 유일하게 원하고 있는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뭉개버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동향 사람이고 자신들과 함께 자라났던 그 예수를 말입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이방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먼저 구원을 받고 자신들은 버림을 받을 수 있다라는 그 사실을 지적하는 예수의 말에 화를 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믿던 메시아 사상, 그들이 믿고 있던 선민 사상을 부정하는 예수를 그들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의 의지, 자신들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에 상당히 분노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는 로마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내버린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라고 표현하는 스데반을 처형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스데반을 살인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 자신들이 선택한 것을 부정하는 세력들을 비난하고 나섭니다. 그리고 그들을 없이하려고까지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의 결정, 자신들의 선택, 자신들의 의도가 선하다라는 것을 증명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일부 사람들이 위와 같은 생각으로 임하는 것 같아서 우려스럽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뽑은 그 선택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번 대선에 임하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한 그 사람들도 그리고 우리나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될 수 있다라는 것, 자신의 의도가 잘못 인용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들으며 믿고싶은대로 믿습니다. 진실을 볼 수 있는 눈,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고 고칠 수 있는 생각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절벽 밖으로 몰아내어 떨어뜨리려고 했던 그 사람들처럼 스데반을 죽였던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같은 죄를 반복할 수 있는 여지를 계속 가지고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잘못, 우리 자신의 죄,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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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척이 없으면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숫양과 함께 돌릴 것이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거제로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모든 성물은 그의 것이 될 것이라 각 사람이 구별한 물건은 그의 것이 되나니 누구든지 제사장에게 주는 것은 그의 것이 되느니라(민 5:5-10)
        
죄를 지으면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께서 그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서 지불하고 그 처벌을 받으면 그만이며,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사람에게 자백을 하며 법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에 따른 처벌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특히 성경에서는 자신이 잘못한 그 잘못에 대한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라고 말을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죄값 더하기 오분의 일 정도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즉 자백했으니까 혹은 처벌받았으니까라고 입을 닦으면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왜곡된 회개 의 달콤함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갛게 씼겨질 것이라는 말씀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에 따른 처벌도 처벌이지만 그 안에 있는 양심의 문제가 상당히 큽니다. 물론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 이미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하나 더 짓는다고 그 마음에 동요가 있을 리가 없는 사람들은 별로 상관이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그러한 양심의 화인 맞은 사람들은 없기에 둘 중에 하나의 상황일 것입니다. 하나는 죄를 지었음에도 죄를 지었는지 모르거나 죄를 지었음에도 그에 따른 자백을 하지 않는 경우 말입니다. 둘 중 첫 번째의 경우에는 하나님께 계속 즉 지속적으로 기도를 드리심으로 해서 해결을 봐야만 합니다. 자신이 자백하지 못한 죄가 있는지, 아직 깨닫지 못한 죄가 있는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확인이 된다고 하면 그 이후에는 위의 말씀을 그대로 이어받으면 됩니다. 자백을 하고 하나님께 속죄의 제물을 드리며 - 회개를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 법의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법의 처벌을 받으면 됩니다.
      
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 그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레 4:27-29)
      
일단 죄를 깨달았다면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세 가지 단계를 - 순서는 별로 상관이 없기는 합니다만 - 거쳐야만 합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자백을 한 다음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리고 법의 처벌을 받으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자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물론 피해를 입은 사람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제 3자 즉 사역자가 용서를 하라고 종용하는 경우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상당히 정말로 위험하다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가해자가 용서를 구한다라는 명분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많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는 용서를 강요할 자격 자체가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마음이 편하고자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 3자의 경우 피해자의 마음을 위해서 권유는 할 수 있으나 역시나 강요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피해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이며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가해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피해자에게 자백을 하고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하고 - 이 당시는 신정국가 시스템이었기에 - 하나님께 속죄를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피해자의 특권이지 가해자의 권리가 아닙니다. 가해자는 용서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자백하고 보상을 할 의무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다라고 한다면 가해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국가의 처벌을 받고 하나님께 회개를 하며 피해자에게 자백하고 보상을 하는 것 그것 외에는 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됩니다. 가해자는 절대로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제 3자의 경우에는 피해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권유하는 방법 외에는 써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는 용서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위해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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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 지파는 나아가 제사장 아론 앞에 서서 그에게 시종하게 하라 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하되 곧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며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막에서 시무할지니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맡겨진 자들이니라(민 3:5-9)
      
삼촌 라반을 피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 야곱은 형의 무참한 학살도 하나님과의 싸움으로 피하게 되었고 한 성읍에서 자신의 평안함을 누리며 조금은 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거하고 있었던 그 성읍의 주인이자  히위 족속인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의 딸인 디나를 욕보였고 그것으로 인해서 야곱의 아들들은 그 도시를 학살하게 되는데 그 가장 앞에 서 있었던 야곱의 아들이 바로 레위와 시므온이었습니다. 이 두 아들은 나중에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갈 때에도 자신들의 과격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므온이 나중에 요셉에게 구금되는 사건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레위와 시므온 특히 레위 족속은 강맹한 전투 종족인 것으로 보입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진노하셨고 하나님의 분노를 공유하게 된 모세는 금송아지를 빻아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먹였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의 패역함의 당사자들 즉 주동자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따르는 자들을 모으게 되는데 그 때 그의 앞에 서 있었던 존재들이 바로 그의 지파인 레위 지파였습니다. 레위지파 사람들은 각각 그들의 허리에 칼을 차고 모세의 뜻대로 아니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 속에 있는 악을 제거합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5-29)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레위 지파는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 아니라 아론 자손들 즉 제사장을 도와 성막을 운반하며 성막을 지키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살해하는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성막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성막을 운반하는 중책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방패로서 그리고 일꾼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이전의 행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사역을 해야만 합니다. 가끔씩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역자가 자신의 이전의 구태를 그대로 입고 나와서 하나님을 믿는 그러나 아직은 여린  그리고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피해를주고나서 하는 말들이 자신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라고 왜곡하여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해서도 안 되며 그렇게 행동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특별히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전의 습관, 이전의 성격을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쓰시기 좋게 사역자들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스스로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하나님의사역자가 되며 자칫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처럼 하나님께 버림받는 사역자가 되어버립니다. 이전의 잘못된 행실, 습관, 구태가 아직 사역자로 있는 사람들 마음에 행동에 남아 있다면 사역을 멈추고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역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왜곡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뜻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불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들이 맘대로 불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들을 쳐서 그들을 사르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역자는 그들의 행동과 습관을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그들의 말들, 그들의 마음에 가진 생각들 또한 조심히 가져야만 합니다. 소명을 받았다면 그 소명이 잃어버리지 않도록 나답과 아비후처럼 하나님께 내쳐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아봐야만 합니다. 지금 자신의 행동, 지금 자신의 마음에있는 것들이 과연 하나님과 상관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전하는 사역자가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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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각 지파의 각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을 너희와 함께 하게 하라(민 1:1-4)
 
성경을 연구하거나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아닌 성경을 통독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주제는 율법 그리고 사람입니다. 통독을 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주제 혹은 힘들어하는 주제라고 한 이유는 율법의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며 사람의 이름 혹은 사람의 인원수가 반복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닫기도 새로운 것을 얻기도 힘들은 이러한 성경구절을 성경을 통독하기 위해서는 읽어야 합니다. 평소에는 절대로 읽지 않을 바로 그 부분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인침을 받은 히브리 민족은 지난 1년 동안 폭풍 같은 변화를 이뤄왔습니다. 이집트 파라오 밑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던 그들은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건너 시내산 기슭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전까지 그들은 인원이 남자만 육십만으로 수가 많았을 뿐이지 국가의 형태를 갖춘 것이 아니었기에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들을 시내산에 1년 동안 모아놓고 율법을 가르치고 천부장 백부장과 같은 그들의 지도자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바로 그 때 출이집트한 히브리 민족은 하나의 민족성 - 물론 그 안에 많은 소규모 종족들이 함께하고 있었지만 - 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이 민족 공동체를 넘어서서 신앙 공동체가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셨고 다른 열강들과 다른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들을 부르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을 대면하기를 원하셨지만 그러나 빽빽한 구름 사이에 계신 하나님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던 히브리 민족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을 대면하기를 거부한 그 이벤트로 인해서 또다른 죄를 짓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전의 행습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금신상 중 하나로 둔갑을 시켜버린 것입니다. 렸고 - 정확히는 금송아지상 - 이후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격하시켜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징벌을 받았는데 단순히 징벌을 받은 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징벌을 받는 중에 레위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사건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시내산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기 위해서 광야를 지나가야 하는 히브리 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을 통해서 그들의 수를 확인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 하나하나가 자신이 어떠한 지파이며 어떠한 일을 해야 하며 어떠한 자리에서 행군을 해야 하는지를 알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탈취하기 위해서 떠나가는 여정을 예상하겠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그 삶 속에서 어떠한 자리에 서 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막사를 치되 그 진영별로 각각 그 진영과 군기 곁에 칠 것이나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민 1:52-54)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즉시 천국으로 입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며 삶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단지 십일조를 위해서 일을 한다라고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직업을 가진 입장에서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삶을 살아내는 모든 사람들 특히 사역자가 아닌 모든 평신도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안에서 살아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보셔야 합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하나님의 사역을 해야만 하고 그 사역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파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레위인과 제사장을 지켜야 하고 먹여 살리기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해야만 합니다.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야만 한다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레위인과 제사장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일을 한다라고 한다면 그들은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사역자만이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또한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보니 헌금만 드리면 혹은 십일조만 드리면 그들의 삶 속에서 주님의 향기가 드러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라고 즉 자신의 일 속에서 부조리를 만들어내거나 발견해도 무시하는 그러한 행태를 보여도 상관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혹은 생각하는 하나님의 백성 즉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만 혹은 사역만 그리고 헌금만 내면 된다라는 안일한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머리 속에서 꺼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맛없는 혹은 맛 잃은 소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정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증명을 받을 수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을 이 세상 속에서 찾고 계십니다.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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