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1-3)
       
요나서는 볼 때마다 참 이상한 성경입니다. 요나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요나의 몸으로 그리고 말로 하는 대화를 그대로 풀어쓴 것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하박국서가 오로지 말로 하는 대화로서 예언서의 전부를 만들어내었다면 요나서는 요나와 하나님의 대화를 몸으로 그리고 말로 보여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요나의 행동을 모두 찾아내시며 모두 확인하시고 요나를 끝까지 추적하십니다. 네 그 말대로 정말로 요나를 끝까지 추적하셔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관철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합니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너희들의 죄가 여호와 하나님께 닿았다라고 선언하라고 말입니다.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이유로 그러한 예언을 하라고 하시는지 명확하게 압니다. 그래서 도망칩니다. 애국자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국수주의자인 요나(왕하 14:25-27)는 이스라엘의 대적 앗시리아가 그대로 멸망하기를 바라지 살아남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요나는 앗시리아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평안을 위해서 하나님 앞을 떠납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 가장 밑바닥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를 추적하셔서 요나가 타고 있는 배에 풍랑을 허락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배 안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기도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신들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던 중 배 밑바닥에서 자고 있는 요나를 배의 선장이 찾아냅니다. 그리고 배의 선장은 요나를 다그칩니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욘 1:6)
   
이방인인 선장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보다도 더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배의 주인이자 이방인이며 이교도인 선장의 입을 통해서 요나를 추적하여 다가와서 말을 거십니다.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나에게 구하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재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방인의 입에서 나온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요나는 배 밑바닥까지 쫓아오신 하나님을 보고 결단을 내립니다. 내 나라 이스라엘을 위해서 저 앗시리아가 완전히 멸망하기 위해서 죽겠다고 말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욘 1:9-12)
    
요나는 배 안에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그 제비뽑기에 요나가 당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한 번 요나를 추적하시고 요나에게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애국심에 철철 넘쳐 있던 요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요구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어떻게 하면 풍랑이 멎을 수 있는가 혹은 자신들이 살 수 있는가라는 배 안의 이방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합니다. 자신을 물 속에 빠뜨려라 그러면 나와 상관없는 너희들은 살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사랑하셔서 그에게 복을 주시지만 악인은 미워하셔서 그에게 저주를 허락하시며 죽음을 주신다라고 믿고 있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가 악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실 것이라고 자신을 죽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굳이 그럴 것이면 자신과 상관없는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하나님 앞에 저당잡힐 일이 없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뜻과 상관없이 도망친 자신은 죽게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그 이방인들에게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니느웨로 절대로 갈 일이 없는 요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 위의 사람들에게 전하고 물 속에 빠집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게서 놓임을 받을 것이라고 요나는 생각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욘 1:17)
   
요나서 1장 17절에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요나서 2장 1절에 요나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요나는 72시간을 버티고 나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스올까지 추적하심을 이제는 요나가 깨달았다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그 이후에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해드리기로 합니다. 아무리 자신이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죽으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낯을 피해서 도망가는 당신의 사람들을 찾으시고 추적하시며 그들을 자신의 뜻대로 돌리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존재입니다. 요나는 심정적으로는 앗시리아의 회복을 절대로 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항복 문서를 입으로 하나님께 전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요나를 다시 뭍으로 돌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요나서 1장 1절의 말씀처럼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니느웨로 간 요나는 원래는 하룻동안 돌아다녀야만 다 전할 수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많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달려서 반나절만에 주파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건성으로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를 하였고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니느웨에 심판을 내리기로 한 결정을 철회합니다. 그러한 철회 소식을 당연히 알고 있는 요나는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 4:1-4)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애국자였던 요나는 이스라엘의 대적인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평안을 되찾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을 용서하시고 살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요나는 자신이 죽기를 바랐습니다. 죽여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요나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설득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날이 아주 더운 날 등나무로 그림자를 만들어 요나를 시원케 하신 하나님은 그 밤에 등나무를 벌레로 모두 말라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메마른 동풍을 불게 하셔서 요나를 거의 죽어가게 만들어버립니다. 너무 덥고, 고되었던 요나는 이제는 힘들어서 죽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등나무를 아낀 것처럼 내가 십만이나 되는 니느웨 사람을 아낀 것이 옳지 않은 행사인가라고 말입니다. 요나는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에 침묵으로 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선지자 요나를 죽음으로 징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찾았고 추적하였으며 그를 설득하였습니다. 죽기를 바라는 그를 살리셨고 그에게 계속 자신의 뜻을 따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요청을 말로만 따르고 마음으로 따르지 않았던 요나에게 또 다가오셔서 그를 설득하십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예화를 몸으로 체험하게 하시고 그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키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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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7:1-4)
     
누가복음을 쓴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누가복음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베드로와 바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을 주인공이라고 하기보다는 주력 인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 성령께서 내려오신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어떤 식으로 로마 제국 내에 있는 그리스 문화권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였는지를 설명하는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경 사도행전은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내용 그리고 새롭게 사도로 맛디아를 뽑은 내용을 적은 다음 2장에서 바로 성령께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에게 임한 사건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부흥의 폭풍을 일으킴을 긴박하지만 담담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이뤄지는 수많은 박해들을 기록하면서 누가복음을 위시한 복음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조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을 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제자들은 말만 앞서고 위험이나 위기게 있을 때에는 자신들의 연약한 믿음의 적나라한 민낯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시고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그들은 죽음을 무릎쓰기도 하고 핍박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말라고 하는 협박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수하는 전투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부족한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유대인들에게만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피가 섞여 있지 않고 유대교로 들어온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예루살렘에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사마리아도 정말로 먼 땅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아직 실질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부의 대적에게는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고 있던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내부에 있는 대적에게는 아직 대항 선언 하나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세상 끝으로 내보내시기 위해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예루살렘에만 머물러서 교회를 세우고 있었던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예루살렘이라는 수도원에서 자신들만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자신들끼리 잘 살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교회에는 한 가지 분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같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이스라엘 안에 있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스라엘 외부에서 찾아온 유대인과의 대립이 있었는데 그 대립이 위험수위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파 과부는 적절하게 구제를 받는데 반해 헬라파 과부는 구제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당시 교회의 모든 일의 책임은 열두 사도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게 되자 열두 사도는 자신들이 구제와 같은 교회 행정 책임을 맞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에만 집중하겠다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 행정과 사무 일에 집중할 사람 즉 집사 일곱을 뽑게 되는데 그 집사의 이름은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였습니다. 이름에서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헬라파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외부에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을 집사로 뽑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히브리 사고와 헬라 사고를 같이 가지고 있었고 이들의 부상은 결국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과 대립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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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내려갔었는데 곧 그들이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채찍이 무딜 때에 그리하였으므로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삼상 13:19-22)
       
단순히 골리앗이 있어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약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나뉘어져 있었고 각 지파마다 독자적으로 생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번 암몬 왕 나하스가 므낫세 길르앗 지파를 침탈하려고 하였을 때 나머지 지파들이 그 소식을 잘 몰랐던 것은 일단 소식을 전하는 통신 기반이 당시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기도 하였지만 길르앗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나머지 지파들이 알 정도로 그들이 가깝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입장에서 더 큰 문제는 블레셋이었습니다. 사울 왕 2년의 때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였는데 사울 왕 이전에 사무엘은 미스바 전쟁을 통해서 블레셋의 영향력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문제는 블레셋의 영향력은 단순히 전투병의 우위를 넘어선다라는 지점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전쟁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 전쟁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울 왕과 요나단 외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쟁기와 같은 농기구를 수리하기 위해서는 블레셋의 농기구를 수리하는 곳 즉 철공에 가서 수리를 받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 철공이 생기도록 블레셋이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철공이 없다라는 것은 대략 두 가지 정도로 이유를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블레셋의 힘의 영향권 자체가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있어서 이스라엘이 함부로 철공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사울 왕이 세워진 것 그 자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속국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두 번째로는 이스라엘이 철기문화를 소유하고 있지 않아 농기구는 어찌 어찌 구입해서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철공을 소유하기에는 여러 모로 부족한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블레셋이 주변 국가에 영향력을 끼치려고 하며 특히 산지 국가였던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만들거나 그들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서 시도를 이번 한 번만 한 것은 아닐텐데 이스라엘에 철공을 은밀히라도 만들지 못했다라는 것은 아직 이스라엘이 철기 문화를 완벽하게 수용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나중에 다윗은 블레셋의 왕 중 하나인 아기스의 수하로 들어가서 시글락이라는 도시를 다스리게 되는데 추측컨데 이 때 다윗은 철기 문화를 흡수하게 되고 이후에 다윗은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이 때 가지고 간 철기 문화로 인해서 이스보셋과의 싸움에서 승전을 거두게 되고 결국 다윗 왕조와 철기 문화는 헤브루 왕국을 팔레스타인 지역 즉 시나이 반도의 패자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의 이스라엘이 그렇게 허약했던 것은 왕권 강화에 실패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들이 철공을 제대로 소유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이방 세력들에 비해서 문화 향유를 하지 못하였고 무기들을 만들기가 힘이 들었던데 반해 다윗은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문물들을 많이 얻을 수 있게 되었고 사울이 얻지 못했던 철기 문화 즉 철공마저도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서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삼상 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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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에게는 사무엘이 있었고 여로보암에게는 다윗 왕조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과 종교 권력 그리고 각 지파들만의 세력이 있는 상태에서 왕권 강화를 노렸고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게 되면서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과 그것을 지키는 다윗 왕조가 있었습니다. 사울 입장에서,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종교 권력과 지파 세력을 물리치고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것이 참 만만치 않았습니다. 둘의 선택은 갈렸지만 둘다 멸망받게 됩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삼상 13:8-12)
      
사울이 사무엘을 무시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왕권이 워낙에나 취약하고 적들이라 할 수 있는 이방 민족들의 세력은 워낙에 강대하다보니 백성들이 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 살 길을 찾아서 흩어지게 됩니다. 그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인데 문제는 사울은 그러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권한조차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렸으나 마침 또 사무엘은 제 때에 오지 않게 되었고 결국 그는 자신에게 없는 제사 권한을 침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불순종하게 된 것, 사울이 사무엘의 권한을 침탈하게 된 것은 백성들이 자신을 떠나버릴까봐였습니다. 이후에도 계속 나타나지만 사울은 자신이 사무엘에게 즉 여호와 하나님에게 버림 받을까봐도 두려워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약한 왕권을 가진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까봐, 혹은 다윗에게 갈까봐 일생을 두려움에 허덕였습니다. 그 스스로는 강한 척 하였지만 다윗의 있는 곳을 알려주는 성읍 사람들에게 언제나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자신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왕권을 해치는 사람의 말은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가 원한 것은 사울 왕조의 공고함이었지만 그가 원한 것 그것 하나를 만들어가려고 하지만 주변 환경이 그를 절대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방 민족들은 강맹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주는 것 없이 자신만 바라보며 그러한 이방 군사들을 물리쳐 주기를 바라면서도 위험할 것 같으면 언제나 흩어질 수 있는 모래알 같은 군사들만 그의 주변에 있었으며 사무엘은 그를 도와 사울 왕조의 왕권을 반석 위에 두는 것 자체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여러가지 일을 그 혼자 스스로 하였습니다. 좀 강하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병사로 데려다 놓았으며 이방 민족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이스라엘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고 사무엘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의 노력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그는 결정적인 불순종을 하게 되면서 - 이스라엘의 말에 따르기 위해서 -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왕상 12:25-29)
      
여호와의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으로 그는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를 솔로몬 왕은 추격하였고 그는 이집트로 도망가 있었다가 솔로몬이 죽게 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북이스라엘의 세력들의 지지를 얻어 르호보암 왕과 담판을 벌였고 르호보암 왕이 북이스라엘의 요구를 거부하게 되자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지지를 얻어 왕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윗 왕조가 북이스라엘에게 고된 노동을 하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만약 르호보암이 북이스라엘에게 좋은 말로 계속 유혹하게 되면 어느 순간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수 있겠고 그렇게 되는 순간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년 최소한 세 번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스라엘 사람 전부 - 북이스라엘 백성까지 포함하여 - 가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만약 북이스라엘 백성을 회유하게 된다면 그 때는 여로보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백성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못하도록 남쪽에는 벧엘, 북쪽에는 단에 금송아지 제단을 만들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강요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여로보암의 뜻에 따르게 되고 결국 그도 왕권 강화를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떠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살기 위해서, 왕권 강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지만 그의 행동 그 자체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행동이 된 것입니다.
    
처음 왕조가 건립이 되어 백성들도 사무엘도 그리고 사울 왕 본인조차도 왕국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였고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시점이기에 그 속에서 사울의 왕권 강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로 인해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은 다윗 왕조가 자신을 침탈할 것이라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결국 금송아지 제단을 만들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북이스라엘은 대대로 왕조가 하나님을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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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듣고 그 백성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르니라(삼상 13:1-4)
        
사울이 왕이 된 지 2년 후에 블레셋 사람들고 싸움이 붙었습니다. 사실 블레셋과 싸움이 붙은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사 시대에도 그리고 사무엘 사사 때에도, 사울이 왕이 될 때에도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에 쳐들어갔습니다. 꼭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양식을 약탈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의 힘을 빼놓아서 이스라엘이 강대국으로 자라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암몬 왕 나하스처럼 이스라엘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이 외세에 침략을 당하는 이유를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보다 약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인간 왕을 달라고 사무엘과 여호와 하나님께 부탁하였으며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사울 왕이기에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계속 전쟁을 치룰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힘이 좋은 장사나, 용맹한 사람이 주변에 보이면 그를 군인으로 쓰기 위해서 징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사울이 영토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원하는 바에 따라 이스라엘은 전쟁에 매번 동원이 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원래 왕이 되는 것을 그렇게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 38에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나귀를 찾아다니는 어찌 보면 선량한 시골 촌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무엘을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왕이 되었고 왕으로서 2년의 세월을 살아갔습니다. 더 이상 그는 시골의 촌부가 아니라 군인들을 거느린 왕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싸움에 노련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와 그의아들들 그리고 그의 군사들은 매번 싸움에 동원되어야만 했습니다.
    
후에 있을 사울의 불순종의 죄 즉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된 이유도 백성들이 좋은 것들 즉 가축들을 살리자고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백성들에게 자신의 죄를 떠넘기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왕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다윗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을 때에도 사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으며 사울이 죽은 뒤에도 이스보셋이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할 정도로 사울은 신망 받는 군주였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삼상 13:8-12)
    
그러했기에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된 이후에 이미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린 사울 왕의 딸 미갈을 다시 돌려보내달라고 한 것인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부은 왕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사울 왕의 딸이라는 신분을 가진 미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에게 미움 받는 왕이 아니라 사랑 받는 왕이었으며 왕의 명령을 두려워서 섬기기보다는 이스라엘은 왕을 따랐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울의 치명적인 약점은 역시나 백성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제사를 드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나 백성들이 흩어지고 백성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게 된 사울은 백성들 앞에서 직접 제사를 드렸고 사무엘은 이후에 오게 됩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어쩔 수 없음을 이야기하였지만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자기 멋대로 제사를 드린 왕 사울에 대해서 잘못했다라고 말을 합니다.
    

 


사무엘과 사울의 불협화음의 시작, 여호와 하나님과 사울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사울이 백성의 뜻을 너무 잘 들어주었다라는 것인데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의 눈치를 너무 봤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그의 왕위가 아직 공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만약 다윗처럼혹은 솔로몬처럼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며 강맹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도 처음부터 하나님을 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군사력은 형편없었고 그의 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백성이 없으면 허수아비 왕이나 다름이 없다라고 마치 북이스라엘의 창시자 여로보암처럼 그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고 살아남기 위해서 전쟁을 했으며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러한 가운데서도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거의 빛을발휘하지 못했으며 그는 왕권이 완벽해질 때까지 왕위에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노력 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지만 결국 그는 사람에게 좋게 하고자 하나님과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그는 불안한 시작과 함께 불안한 왕의 생애를 살았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삼상 1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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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야베스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삼상 11:1-3)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왕위를 허락하셨다라고 선포한 다음 사울에게는 몇몇의 추종자들이 붙었을 뿐 이스라엘 전체가 사울을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수백 년 동안 사사 시대를 거쳤던 그들이 갑자기 왕이 출연한다고 해서 자신이 원래부터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을 뜬금없이 왕으로 지지한다고 이야기하기가 힘이 들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왕위에 대한 사무엘의 해석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은 끝이 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소처럼 그렇게 살아나가고 있었습니다.
     

 


암몬 왕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에 상대하여 진을 치자 길르앗 야베스는 과거의 다른 이방 종족들에게 한 것처럼 당신들을 섬기겠으니 전쟁하지 말자라고 요청하지만 암몬 왕 나하스는 길르앗 야베스를 완전히 절멸을 시키고 이스라엘 전체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보여줍니다. 과거 이스라엘을 사사 시대 동안에 공격했던 다른 이방 종족들과 그 생각이 사이즈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길르앗 사람들은 이스라엘 온 종족들에게 자신들의 위급함을 알리게 됩니다.
    
사울은 평소와 같이 자신의 아버지의 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길르앗이 암몬 왕 나하스에게 굴욕을 당하고 절멸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때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마음에 강하게 감동을 주셔서 이스라엘 전체 지파에 소 한 마리씩 그 머리를 보내어 - 피가 뚝뚝 흘리고 있는 -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들의 소들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선언을 들은 모든 지파 사람들은 그들의 소가 아니라 자신들이 그렇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모두 두려워 떨며 사울에게로 모여듭니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삼상 11:6-8)
             
그 때 당시에 있을 수 없는 군대의 규모가 사울을 따르게 됩니다. 정말로 그 군대가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이스라엘 전체 지파에서 사울에게 각 지파의 이름으로 군대를 보냈다라는 사실이고 그로 인해서 사울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전체의 대표이자 대리자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획득하게 됩니다. 즉 사울 왕이 암몬 왕 나하스를 이겼느냐 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스라엘 전체의 지파에서 군대를 받았다라는 것이 중요했다라는 것입니다.
      

  


그 뒤는 상당히 싱겁게 끝이 납니다. 사울은 길르앗 야베스에게 바로 가소 암몬 왕 나하스를 치겠다고 말하고 길르앗 야베스는 암몬 왕 나하스에게 다음 날 그들에게 가겠다고 거짓 항복 선언을 했으며 그 다음 날이 되기 이전에 사울은 암몬 왕 나하스를 온전히 쳐서 길르앗 야베스를 구원하였으며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찬란하게 빛을 내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울 왕은 이스라엘 전체에게 군대를 얻는데 성공하였고 그 군대로 암몬 왕 나하스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바로 이 때 사무엘은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서 길갈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도착하였을 때 즉 정복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들이 기지로 쓰던 유서 깊은 길갈에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이스라엘 왕으로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정합니다. 길갈에서 새로운 왕을 세우고 왕정으로서 이스라엘을 탈바꿈 하겠다고 결정한 것으로 이스라엘은 지파 연합 체제에서 왕정으로 그 틀 자체가 변화되었습니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삼상 11:1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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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야베스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삼상 11:1-3)
     
이스라엘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 일컫는 이스라엘 땅은 크게 구분을 한다면 요단강 이편과 저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땅은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요단강 이편이라 칭할 수 있는 지중해와 요단강 사이의 땅을 의미하며 요단강 저편은 원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선택하신 땅은 아니었으나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 중 반 정도 되는 사람들이 요단강 이편 땅 즉 동편 땅을 보니 괜찮아 보여서 모세와 여호와께 요청하였습니다.
     
모세가 원래는 반대하려고 하였으나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반 정도 되는 사람들 중 족장들이 고 이스라엘과 남은 싸움을 함께 싸우겠다는 전제를 걸고 다시 한 번 요청하였고 그 요청에 모세와 여호와 하나님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원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땅이었던 그 땅들을 세 지파가 차지하게 되었고 그러한 상황은 그들이 앗시리아에 잡힐 때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이방 종족이 있었으니 바로 암몬 종족이었습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하니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 하니라(삿 11:12, 13)
            
암몬 사람들은 요단 동편 땅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령한 바로 그 땅을 차자히기 위해서 길르앗 사람 입다가 활동했던 사사기 시대 때에도 공격하였고 사울 왕이 처음 등극할 때 즈음에도 공격을 하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주변에 왕을 가지고 있는 이방 종족들이 많이 있었고 그 종족들에게 사사 시대 동안에 줄기차게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원래는 요단 서편 즉 지중해와 요단강 사이의 모든 땅을 차지해야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그 중 산지만 얻었을 뿐 지중해 근처의 평지 땅 즉 평야는 제대로 획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산지 땅에만 있다라는 것은 그만큼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고 하나의 왕이 집권하는 중앙집권체제가 아니라 지파 연합 집권 체제이다보니 백성을 하나로 모아 이스라엘의 적들과 싸우는 일에는 많이 취약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사사 시대에는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지파 별로 대적들과 싸우기 위해서 지파 중 하나에 사사를 세워서 한 지파 혹은 두 지파 이상의 연합군을 만들어서 싸움을 도모하였고 그렇게 해서 사사 시대를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방 종족들과의 차이 즉 발전의 속도가 차이가 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도 왕이 있어야 하겠다고 사무엘과 여호와 하나님께 요청하였고 완전한 신정 체제를 원했던 사무엘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원하는대로 왕을 세우기로 결정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에게 왕위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울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왕이 되었다는 칭호만 가지고 있었을 뿐 왕권을 위한 지파들의 지지도 없었고, 강력한 권력의 상징인 상비군도 없었습니다. 단지 사울 왕이라는 칭호만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왕이 필요한 이스라엘, 아무것도 권력이 없는 사울, 이렇게 미묘한 상황이 계속 되고 있었을 때에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요단 동편 길르앗 땅을 침탈하기 위해서 암몬 족속이 다시 한 번 나서게 되었습니다.
     


길르앗 지파가 온 족속에 전령을 보냈다라는 것은 그들이 사울을 왕으로 여기지 않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사울을 왕으로 여겼다고 한다면 그들은 단 하나의 전령을 사울이 있는 곳으로 보냈을 것이지만 그들은 온 족속으로 자신들을 도울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보냈고 과거처럼 새로운 사사가 출연하기를 간절히 바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완벽히 인정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만약 암몬 왕 나하스가 길르앗을 점령하려고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면 즉 길르앗에 온전한 복종이 아닌 완전한 절멸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사울이 활약할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길르앗은 암몬 족속을 거스를 힘이 없었고 이스라엘 전체 입장에서는 길르앗을 도울 수 있는 동력도 그리고 구심점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 놓으셨고 사울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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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도다 그런즉 이제 너희의 지파대로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 하고(삼상 10:17-19)
        
사무엘은 처음부터 왕이 세워지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아와서 사사였던 그리고 사사들의 아버지였던 사무엘에게 다른 이방 민족들처럼 자신들에게도 왕을 달라고 하였을 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요청을 마뜩치 않아 하실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사사는 하나님의 전권을 대리하는 사람일 뿐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에 사무엘도 하나님도 기분이 좋을리 만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대로 해주라고 명령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미 사울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가는 길에 기름을 머리에 부어 왕으로서 이미 하나님께서 택하셨다고 예언을 하였지만 그것과 더불어 음식을 대접하고, 기름을 부은 바로 그 사이 저녁에서 심야까지 지붕 위에 사울과 앉아서 대담을 하였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으신지 대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뽑으신 이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들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와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사무엘이 바로 자신이 집 라마로 돌아간 것과 달리 사무엘은 사울을 자신의 집에 유숙하게 하고 그와 더불어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을 공유했다라는 점입니다.
        


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그들이 달려 가서 거기서 그를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삼상 10:21-24)
    
비록 소극적이고 소심한 사울이었지만 사무엘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였다라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왕을 택하는 바로 그 자리에 참석은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소심함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짐들 사이에 숨어 있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가 짐들 사이에 숨어 있다는 것 그리고 나왔을 때 사람들보다도 머리 하나만큼 더 큰 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울의 이미지를 독자에게 알려줍니다. 즉 사울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만큼 아름다웠으며 그럼에도 소심하기도 하지만 겸손한 왕이었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게 사울을 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개하였지만 아직까지는 사울을 정식으로 왕으로 옹립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추측이기는 한데사울을 왕으로 옹립하지 않은 이유는 사울이 왕으로서 최소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정받을 정도의 전과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사무엘에게도 필요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고 아직 왕을 세워본 적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도 사울을 어떻게 왕을 세워야 할 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울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왕으로 이미 택함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공증은 받았지만 그러나 정식으로 왕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닌 아직까지는 미묘한 위치에 있는 그는 그러한 그의 위치에 대해서 조급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아람 왕 하사엘처럼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위해서 다급하게 일을 꾸미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각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왕이 되도록 하신다면 제비뽑기 중에 자신이 뽑힌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이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는 방도를 만들어 주실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울의 생각은 곧 응답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고 모든 백성을 각기 집으로 보내매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과 함께 갔느니라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삼상 10: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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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1, 7)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언받은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무엘이 예언했던 소소한 일들에 대해서 응답을 받습니다. 나귀를 이미 찾았다는 전령을 받은 것이나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예물을 받은 것이나 선지자들 틈에 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언을 할 것이라는 그 스스로에게는 첫 번째 것을 제외하고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고 그로 인해서 사울은 사무엘의 가장 큰 예언일 수 있는 사울 그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에 심증을 굳힐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예언을 믿지 못했다면 미스바에서 모이는 이스라엘 왕을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바로 그 때에 사울이 참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용기는 좀 부족해서 숨어 있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간에 사울은 여호와의 영을 크게 받아 예언을 한 이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숙부 넬을 만나게 됩니다. 어차피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같이 갔던 사환이 그에[게 다 알릴 것이므로 나귀들을 찾기 위해서 사무엘을 찾아갔다라고 실토를 하게 되었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묻는 넬에게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사무엘의 예언에 대해서는 함구를 하게 됩니다.
      
소심하다고 볼 수 있지만 신중하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사사기 시대 초기 때에 이스라엘에게 거의 전멸할 뻔하였기에 인구 수 자체가 적었고 사울 그 자신도 말했지만 기스와 넬이 있는 그 집안은 그리 큰 집안이 아니었기에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면 자칫 엄청난 전화가 그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울은 숙부라 하더라도 넬에게 알릴 수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왕을 구할 것이라는 소문이 꽤 오랫동안 퍼져 있었을 것이기에 사무엘을 만났다는 사울에게 일말의 기대를 넬이 안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 반드시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그가 부끄러워하기까지 그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우니 하사엘이 이르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하는지라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그들의 성에 불을 지르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니 하사엘이 이르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하더라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더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가서 그의 주인에게 나아가니 왕이 그에게 묻되 엘리사가 네게 무슨 말을 하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왕이 반드시 살아나시리이다 하더이다 하더라 그 이튿날에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으매 왕이 죽은지라 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왕하 8:10-15)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엘리야에게 세 명의 인물을 추천합니다. 새로운 선지자 엘리사, 새로운 이스라엘 왕 예후, 새로운 아람 왕 하사엘입니다. 여기서 하사엘은 엘리사가 직접 그에게 왕이 될 것을 예언을 하게 되는데 그 예언을 하기 이전에 당시 왕이었던 아람 왕 벤하닷의 병의 치유 유무를 하사엘은 물어보았고 엘리사는 그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하사엘이 순리대로 왕이 되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함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사엘은 엘리사를 통해서 자신이 왕이 될 것을 예언받았기에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벤하닷 왕을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왕이 된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사울은 스스로의 힘으로 왕이 되기를 노력했던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때를 기다리라고 말한 것처럼 왕이 자신에게 주어질 때까지 침묵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환도 모르고 숙부 넬도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간직한 이후에 때가 되었고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이라고 통지하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을 세우기 위해서 그곳으로 모이게 됩니다.
          
사울의 숙부가 사울과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디로 갔더냐 사울이 이르되 암나귀들을 찾다가 찾지 못하므로 사무엘에게 갔었나이다 하니 사울의 숙부가 이르되 청하노니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말하라 하니라 사울이 그의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이 말하던 나라의 일은 말하지 아니하니라(삼상 10: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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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산당에서 내려 성읍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그들이 일찍이 일어날새 동틀 때쯤이라 사무엘이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이르되 일어나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하매 사울이 일어나고 그 두 사람 사울과 사무엘이 함께 밖으로 나가서 성읍 끝에 이르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환에게 우리를 앞서게 하라 하니라 사환이 앞서가므로 또 이르되 너는 이제 잠깐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더라(삼상 9: 25-27)
      
어린이 성경학교 때부터 대예배까지 모든 예배에서 다윗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많이 다뤄집니다. 다윗은 대왕이라고 불려졌던 히브리 민족의 두 번째 왕이며 수없이 많은 영웅 서사시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하나님의 사랑까지 받았던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해서 사람들은 더 많이 알기를 원하고 그에 대해서 더 궁금해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만큼 그의 대적자 중 하나였던 사울 왕에 대해서는 대부분 왜곡되이 말하거나 적어도 그의 이야기를 축소해서 말합니다. 그를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고 싶지도, 이해할 생각도,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던 히브리 민족의 왕이었다라는 사실, 다윗보다 먼저 왕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지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기에 이스라엘에 왕을 두고 싶지 않았던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스라엘에 왕을 두고 싶다면 꼭 이 사람으로 해라라는 식으로 사울 왕을 선택한 것이라는 것 즉 그만큼 사울 왕을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인정하셨다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다윗 왕 이전의 사울 왕과 사무엘 이야기, 그리고 사울 왕과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편견없이 성경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귀들을 찾으러 사환들과 베냐민 땅을 떠돌아다니던 사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선견자에게 찾아가 나귀들의 행방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하나님의 선견자 사무엘은 하나님께 싸인을 받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신 왕의 재목이 사무엘을 만나러 온다는 바로 그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결국 사울과 사환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준비해놓은 자리에 같이 불러들여 그들을 대우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무엘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운다라는 것 그 자체를 그리 좋아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울과 대화하는 것에, 사울에게 기름 붓는 것에 그리 인색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역시나 사울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기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했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시기를 원하셨다면 자신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대접하기를 마친 사무엘은 자신과 사무엘이 거처하고 있던 집 지붕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서, 얼마나 대화를 이뤘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 이후에 그 다음날 잠에서 깬 사울에게 사무엘은 거리낌 없이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이끄시는대로 행하라고 권고합니다. 물론 사무엘은 사울이 어떠한 사람이든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기에 기름을 부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과 사울의 대화는 의미심장합니다. 그 대화 이전에 사무엘은 사울을 예의를 다합니다. 사울의 집과 사울이 이스라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울이 하나님이 택한 왕이라는 사실을 사무엘이 인지한 것이지만 둘의 대화가 마쳐진 이후에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사울이 어떠한 사람인지 어느 정도 파악을 한 것 같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후에 왕을 뽑는 이스라엘의 모임 속에서 사울이 어떠한 행보를 보일 것인지에 대해서 사무엘은 적어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0여 년 후에 사울과 사무엘은 완벽히 갈라지지만 그러나 그 갈라질 때에도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힘들어 하고 울적해 있습니다. 마치 오래된 벗과의 이별을 하는 것처럼말입니다. 새로운 왕을 뽑아야 한다고 이새의 집으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거부 의사를 보이기도 합니다. 사울에게 죽을까봐라고 말하지만 반 정도는 그 이유가 맞는 것 같고 반 정도는 가기 싫다라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마저 추측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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