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1-4)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커리어를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 그 자체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 주인,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결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스펙을 쌓아가며,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도 그의 집안이 어떠한지, 그의 외모가 어떠한지, 그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먼저 보았던 우리네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사람을 쓰는 방식, 당신이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 당신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 그 자체를 인지할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으며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구약은 선민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담금질 당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서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이냐 아니냐입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을 소개할 때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그의 육대조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부터 따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져나가다가 결국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선택적으로 - 사울 왕이나 다윗 왕처럼 - 그의 외모를 표현하여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매력이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들어와서 어떠한 지파에 속해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써놓은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가 될 것이라는 인자 사상이 당시 넘쳐 흘렀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누구의 후손인지가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워낙에 그의 사도성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사람으로서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그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이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인지 알리는 것이 중요했고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지를 알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울 외에는 제대로 조상을 설명해주거나, 어떤 지파에 속해 있다고 알려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외모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지금도 예수님을 묘사할 때에 뽀글 머리인지 생머리인지를 잘 몰라서 각각 자신들의 잘 생긴 사람을 표본으로 삼아서 예수님의 그림을 그려놓은 화가들이 많았을 정도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과 사귐을 가지려고 할 때 그 사람의 집안을 이야기하고, 그 사람의 외모를 평가하며 그 사람이 가진 재산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학력을 가졌는지, 어떤 직장을 다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사귀고 싶은 사람을 결정하고 자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목수였고, 제자들은 어부였거나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세리였으나 그들은 그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았습니다.
    


집안에 대해서 알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부족한 부분 - 장애가 있거나 돈이 없거나 병이 있거나 - 은 채워지기 위해서 서술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믿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필요를 당신에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믿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교제를 나누면서 자신과 급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들과 다양한 교류를 통해서 재화를 획득하는데 있어서 시너지 효과를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용광로가 아닙니다. 교회는 더 이상 층위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되는 곳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교회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렇기에 감투가 중요하며, 학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떠한 집에서 살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수없이 많은 아쉬운 모습이 지금은 있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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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전 3:16-19)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정말 흔하게 있지만 그러나 근대 이전만 하더라도 민주주의 국가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민주주의 국가 혹은 도시 국가의 원형을 뽑는다면 아시다시피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를 떠올립니다. 당시 도시국가 아테네는 비록 여자와 노예를 제외하기는 했지만 모든 도시의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당시로는 정말로 획기적인 정치제도였습니다. 그러한 정치제도가 못마땅했던 주변에서는 정말로 나중에 그 도시를 정복하고 나서 한 일이 그 도시의 무자산 시민들 대부분을 아테네에 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차이나는 클래스에 출연하는 출연진들 - 강사가 아닌 출연진들 - 중 일부는 고대 아테네를 민주주의의 종착지로 즉 이상향으로 보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촛불집회로 대변되는 광장 민주주의처럼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테네가 꼭 좋은 모습만 보여줬던 것은 아닙니다.
   
페르시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아테네는 제국이 되어버립니다. 델로스 동맹의 수장으로서 그리스 지방, 흑해, 이집트 지방까지 자신들의 세력권을 넓힙니다. 그리고 그리스 내에서 세력을 확립하기 위해서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정을 선택한 - 즉 자신들의 편인 델로스 동맹이 아닌 - 스파르타 혹은 스파르타가 중심인 동맹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일전을 결하게 되는데 초반부터 조금은 삐그덕 거렸고 그로 인해서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바로 도시국가 멜로스였습니다. 멜로스는 중립국가였으며 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아테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였습니다. 또한 육지전을 압도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비해서 해전을 압도하는 델로스 동맹에게 멜로스는 중립국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편에 서 있지 않은 세력이었습니다. 그러한 세력을 후방에 둘 수 없었던 아테네는 멜로스에게 델로스 동맹에 들어올 것인지 자신들과 싸울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요구받게 됩니다.
   
멜로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서 아테네 그리고 델로스 동맹의 강압으로 맺게 되는 동맹을 거부하게 되는데 하나는 힘으로 약소국을 징벌하게 되면 신이 돕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스파르타가 자신을 돕기 위해서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델로스 동맹 아니 아테네 제국의 수장 아테네는 약육강식을 몸소 이야기합니다. 즉 강자인 아테네는 약자인 멜로스를 처분이 가능한 것이 자연의 법칙이며 신의 뜻이라고 말하며 스파르타가 멜로스를 돕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멜로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지속하기 위해서 거대한 제국 - 민주주의 국가인데 - 아테네와 싸울 것을 결의하였고 그 싸움에서 졌습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싸움에서 진 멜로스를 아테네 제국의 - 민주주의 국가인데 - 승자이자 강자인 자신들의 뜻대로 처분을 하였습니다. 즉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 일화는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적 관점, 즉 힘의 논리를 잘 설명하는 가장 고전적인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이 힘의 논리는 근대의 정치현실주의로 발전한다고 합니다.
   
아래 글은 멜로스의 대화 즉 아테네 제국과 멜로스 국가의 대담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의외로 아테네가 멜로스에게 근거를 대서 조목조목 자신들의 의견 즉 자신들이 멜로스를 치는 이유 혹은 멜로스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테네와 멜로스의 대화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현실 정치에서 그리고 국가간의 정치에서 개인의 도덕과 윤리로 호소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멜로스의 대화

   
아테네인: 이제 우리는, 우리가 페르시아인들을 무찔렀기 때문에 제국에 대한 의무를 갖는다는 식의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들에게 비록 당신들이 스파르타를 돕지 않았다거나 우리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다는 식의 말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영향을 줄수 있다고 상상하지 말것을 요구할 것이다. 당신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잘 알겠지만 이런 문제들이 실제적으로 논의될 때 정의의 기준은 강제할수 있는 권력의 질에 달려있다. 사실상 강자는 그들이 할 힘이 있는 것을 하는 것이며, 약자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멜로스인: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에서는 (왜냐하면 그대들은 우리가 정의를 고려할 수 없도록 만들었으며 우리 자신을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당신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선에 대한 원칙, 즉 위험에 빠진 모든 사람의 경우 공정한 행동과 정당한 취급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아테네인: 우리는 우리 제국이 당신들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 문제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당신들이 당신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생명을 보존하기를 원한다.
 
멜로스인: 그렇지만 우리가 노예가 되는 것과 당신들이 주인이 되는 것이 어떻게 똑같이 좋은 일일 수 있는가?
 
아테네인: 당신들은 항복함으로써 재난으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고 우리는 당신들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당신들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멜로스인: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중립이 되어 적 대신 친구가 되지만 어느 쪽과도 동맹을 맺지 않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가?
 
아테네인: 그렇다. 만약 우리가 당신들을 우호적으로 대하게 되면 우리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그것이 우리가 유약하다는 표시라고 간주할 것이다. 반면 당신들의 증오심은 우리의 힘의 증거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들을 정복함으로써 우리 제국의 크기뿐 아니라 그 안보도 증대시킬 것이다.
   
멜로스인: 하지만 당신들은 우리의 제안에는 당신들을 위한 안보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여기서 다시 당신들은 우리에게 정의를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고 당신들의 이익에 승복하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익이 무엇인지 말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대들의 이익과 우리의 이익이 합치된다면 우리는 당신들에게 그 사실을 설득해야 한다. 현재 중립적인 국가들이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게 되면, 당연히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 당신들이 그들도 공격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 당신은 그들 모두를 적으로 만들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전쟁에서 운명은 가끔 약자에게 좀 더 많은 여지를 준다고 알고 있다.
   
아테네인: 그런 생각이 위험 속에서 위안이 되기를!
   
멜로스인: 우리들은 그릇된 것에 반하여 옳은 편에 서 있으므로 신이 당신들과 동등한 행운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힘이 부족한 것은 우리와 스파르타인과의 동맹으로 채워질 것이고, 그들은 다른 이유보다도 명예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선린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를 도우러 올 것이라 믿는다.
  
아테네인: 신의 호의에 관한 한 우리도 당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신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인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의하면, 우리는 무엇이든 가능한 것을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일반적으로 필연적인 법칙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만들어진 후 우리가 처음으로 그에 따라 행동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존재하는 상태에서 발견했고, 이것을 우리 이후에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영원히 존재하도록 남겨둘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우리는 당신과 다른 이들도 우리와 동등한 권력을 갖는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에 관한 한 우리가 불리한 편에 서 있다고 걱정할 만한 이유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스파르타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명예를 고려하여 그들이 당신을 도우러 올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서는 당신의 단순함이 놀라울 뿐이지만 당신의 어리석음을 부러워하지는 않을 것임을 말해두겠다......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 중에 스파르타인들은 명예롭다거나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 정의롭다고 믿기에는 가장 의심스러운 자들이다.
  
멜로스인: 그러나 이는 바로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그들의 이주민인 멜로스인들을 배반하지 못할 것이다.
 
아테네인: 당신들은 만약 어떤 이가 자신의 이익을 따른다면 자신이 안전하기를 바랄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반면 정의와 명예의 길은 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린다......잘못된 명예의 감각으로 인해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당신이 만약 올바른 견해를 취한다면 이를 피하기 위해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전쟁과 안전 중에서 선택을 하도록 허용되었을 때 잘못된 선택을 할 만큼 무감각하게 오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헬라스의 가장 거대한 도시가 당신에게 조공에 기초를 둔 동맹과 당신 자신의 부를 즐기는 자유를 허용할 정도로 합리적인 조건을 제시했을 때 그에 승복하는 것은 불명예가 아님을 알 것이다. 동등한 자에게 대항하고, 우월한 자에게 존경심을 갖고 행동하고, 약한 자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 안전의 법칙이다.
  
멜로스인: 아테네인들이여, 우리의 결정은 처음과 똑같다. 우리는 우리 도시가 탄생한 이후 700년 동안 누려온 자유를 짧은 순간에 포기할 마음이 없다.
   
아테네인: 당신은 단순히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불확실한 것을 현실로 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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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 19)
     
지금도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이 원래 다녔던 교회에서 사역하기보다는 다른 교회로 떠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원래 다녔던 교회가그에게 맞지 않았던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원래 다녔던 교회는 그를 사역자로 대우하기보다는 그를 어린 아이로 대우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사역자가 사역자로서 기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가지 것 중 하나가 바로 성도의 지지인데 그를 어린 아이로 볼 수 있는 성도들이 다수라고 한다면 다른 교회로 떠나는 것이 더욱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라났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서 그곳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도 아무리 병든 자들을 고친다 하더라도 - 소소히 고쳤다라는 기록이 다른 복음서에는 있습니다 - 그를 그들은 메시아로 보기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소년 예수, 가족이 자신들과 함께 있기에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그를 바라보기 힘들었습니다. 나사렛에서 그는 단지 목수 예수였을 뿐이며 메시아로서 병든 자를 치료하는 존재로서의 예수는 그들에게 생소했으며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나사렛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보았으며 목수였던 예수를 보았던 나사렛 동네 사람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려고 하지 않았고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그들을 구원할 존재로서, 인자로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를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을 뿐 예수를 돌로 치려는 시도를 처음부터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동향 친구나 다름이 없는 예수를 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 4: 25-27)
    
나사렛 사람들을 포함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카비 혁명에 뒤이었던 하스모니아 왕조가 로마에 굴복하게 되었고 이방인인 헤롯의 왕조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이스라엘에 메시아가 도래하여 로마를 격파하고 헤롯 왕조를 멸절시킬 것이라 그들은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라고 있었던 메시아는 자신들 틈에 있었던 목수 예수가 아니라 천군 천사를 지휘하며 하늘ㅇ에서 강림하는 군사령관이자 하나님의 사자인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음으로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라고 선포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구휼을 받았던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과부, 엘리사 시대에 나병을 고침받았던 수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나 혐오하던 이방 사람들이었는데 그러한 이방 사람들이 구원받았던 것과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나사렛 사람 더 나아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경고에 나사렛 사람들은 분기탱천합니다. 감히 선민인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저주하는(응?) 예수를 그들은 절벽으로 끌고가서 죽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소망을 버리라고 촉구하는, 자신들이 유일하게 원하고 있는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뭉개버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동향 사람이고 자신들과 함께 자라났던 그 예수를 말입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이방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먼저 구원을 받고 자신들은 버림을 받을 수 있다라는 그 사실을 지적하는 예수의 말에 화를 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믿던 메시아 사상, 그들이 믿고 있던 선민 사상을 부정하는 예수를 그들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의 의지, 자신들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에 상당히 분노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는 로마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내버린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라고 표현하는 스데반을 처형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스데반을 살인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 자신들이 선택한 것을 부정하는 세력들을 비난하고 나섭니다. 그리고 그들을 없이하려고까지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의 결정, 자신들의 선택, 자신들의 의도가 선하다라는 것을 증명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일부 사람들이 위와 같은 생각으로 임하는 것 같아서 우려스럽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뽑은 그 선택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번 대선에 임하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한 그 사람들도 그리고 우리나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될 수 있다라는 것, 자신의 의도가 잘못 인용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들으며 믿고싶은대로 믿습니다. 진실을 볼 수 있는 눈,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고 고칠 수 있는 생각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절벽 밖으로 몰아내어 떨어뜨리려고 했던 그 사람들처럼 스데반을 죽였던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같은 죄를 반복할 수 있는 여지를 계속 가지고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잘못, 우리 자신의 죄,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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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키보드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컴퓨터가 오면 마우스와 마찬가지로 딸려오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키보드가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또한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에게 키보드는 그저 그런 컴퓨터 주변기기 중 하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키보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이제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은 키감, 타건음, 디자인, 키보드의 재질, 키캡의 재질, 하우징의 재질까지 돈을 좀더 들여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키보드를 사고 싶어합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키보드가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키보드가 눌려지지 않네 그러면 이것 버리고 다른 것 사야지라고생각하는 키보드 문외한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키보드의 전문가냐 사실은 또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제가 좋아하는 키보드의 종류 즉 키감, 디자인, 타건음을 확실히 알며 내 취향을 위해서, 내 기호를 위해서 돈을 어느 정도는 사용할 수 있는 키보드를 새롭게 알아가는 입문자에 불과합니다.

 

 

    
키보드는 크게 기성품과 커스텀이 있습니다. 마치 기성복과 맞춤복이 있는 것처럼 기성품을 이용하는 유저는 제품으로 사서 그냥 사용하는 경우 혹은 레지스트리나 딥키 즉 키의 일부를 내가 원하는 취향대로 바꿀 수 있는 정도입니다. 기성품은 가격대 작게는 만원 안 쪽에서 많게는 수십만 원대까지 이를 정도로 상당히 비싼 키보드가 많으며 심지어 해피해킹의 한정판 같은 경우 - 금칠을 하기도 하고 옻칠을 하기도 했지만 -  사백만원대까지 이를 정도로 비싸기도 합니다.
  
커스텀은 키보드의 부품을 구입하여 자신이 원하는 취향대로 키보드를 조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조립할 수도 있고 타인에게 조립을 문의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키감, 타건음, 디자인 그리고 재질을 위해서 돈이 깨지는 것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작게는 이십만원대에서 많게는 백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커스텀을 원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다양합니다. 장식용으로 갖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기성품 즉 제품으로 나오는 키보드가 자신이 원하는 기능 혹은 원하는 디자인이나 키감, 타건음을 갖지 않을 때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커스텀을 제작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키보드의 종류를 더 알아보는 것은 다음에 하도록 하고 최근 제가 키보드를 제가 원하는 키감을 위해서 중고가를 구입하게 되면서 제가 갖게 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손톱을 최대한 짧게 깎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손톱을 위생을 위해서 안 깎은 것은 아니지만 키보드에 관심을 갖게 되고 키감과 타건음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손톱을 최대한 짧게 깎아 키보드의 키감을 즐기게 된 것입니다. 결국 키보드 기호를 갖게 되면서 습관 하나가 새로 생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들은 제가 가지고 있는 키보드를 찍은 것은 아니지만 제가 선호하는 키보드 사진들을 구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실력도 없고 글을 쓸 수 있는 여건도 안 되어 글을 더 나아가지는 못하고는 있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가 좋아하는 무접점 키보드의 종류 그리고 무접점, 기계식 그리고 멤브레인 키보드의 차이점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해보고는 싶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제가 키보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 입문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 얼마나 잘 알려드릴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전 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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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역할에 대해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론의 역할이 오직 사실만을 전달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언론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언론은 자신이 얻어낸 사실이 사실의 전부인지를 판단하고 사실의 전부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사실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추려서 정보를 엄선합니다. 그리하여 그 사실을 끄집어내는 그 마음을 가지고 시청자들에게 전달합니다.
      


언론이 시청자들에게 판단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청자들에게 판단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들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잘 풀어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언론이 그렇게 하기가 힘이 든 것은 언론도 사람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이익단체이기 때문입니다. 언론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중을 끌어가기를 원합니다. 물론 그들은 잘 모르는 대중을 우리가 이끌어야 한다는 인텔리 의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론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인텔리 의식이 아니라 시청자들이 잘 모른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이라 하더라도 시청자 탓을 하기보다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사실을 잘 재단하여 최대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러나 최대한 왜곡되지 않도록 전달해야만 합니다. 스스로가 이익단체임을 한 쪽으로 편향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 언론에게 필요합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없으면 자칫 언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들은 공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언론에 대한 대중의 우려는 단순히 언론이 이해못할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언론은 시청자들이 그리고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내고 단순화 시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도 또한 이익단체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선정한 정보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얼마나 편향되어 있는지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 스스로가 그 안에 갇혀 있기에 - 대중에게 그대로 전달하다가 결국은 비판을 자초한다라는 사실입니다.
   

 


언론과 마찬가지로 정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완전히 사적인 감정, 사적인 이익을 배제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대중은 언론에게 요구해야만 합니다. 사실 전부를 이야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실을 요약하는데 있어서 왜곡시키지 말고 균형감을 잃지 말고 전달해 달라고 말입니다. 언론이 너네들은 잘 모르니까 우리가 떠먹여주는 것만 먹으면 된다라고 말한다면 단호히 그들을 거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손석희와 박지원의 인터뷰 속에서 박지원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며 믿고 싶은 것만을 믿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언론과의 인터뷰와 손석희의 인터뷰가 많이 다르다라고 느낀 것에 대해서 그는 단순히 낯설다라고 느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정당에게 이렇게 직설적으로 그리고 왜곡없이 - 찬사 없이 - 말을 꺼내는 언론인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박지원은 지난 번 인터뷰 때와 마찬가지로 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손석희도 언론인이기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내용들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자신이 내보내야 하는 정보들을 대중에게 그리고 시청자에게 보여줘야 한다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 시청자는 손석희 즉 뉴스룸이든 아니면 다른 방송국 혹은 신문이든 언론 매체이든간에 균형 있는 정보인가, 그리고 그 정보에 왜곡이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 세심하게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언론의 왜곡, 언론의 권력화가 이뤄지는 것은 정보의 취사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언론의 권력화가 이뤄지지 않기 위해서는 언론을 통제하려고 하는 정치인들 그리고 경제 거물들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도록 언론인에게 힘을 줘야 하지만 또한 언론인 스스로가 권력자가 되지 않도록 그들을 견제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중, 정보를 공정한 필터를 통해서 제대로 알아들으려고 하는 시청자입니다.
            

 

  


내가 이렇게 그들을 치는 까닭은, 그들이 내 백성을 잘못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무엇하나 잘 되는 것이 없는데도 잘 되어 간다고 하여 백성을 속였기 때문이다. 내 백성이 담을 세우면, 그들은 그 위에 회칠이나 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들에게, 그 담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여라. 내가 소나기를 퍼붓고, 우박을 쏟아내리고, 폭풍을 일으킬 것이니, 그 담이 무너질 때에, 그들이 발랐던 그 회칠이 다 어찌되었느냐고, 비난하여 추궁할 것이라고 하여라(겔 1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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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우하지 않으면 자신의 권한도 책임질 수 없으며 자신의 인격 또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우를 받지 않은 순간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백인우월주의는 엄혹하게 말해서 백인 외에 다른 인종은 백인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부터 나옵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당연히 백인이 아닌 사람이 감히 백인과 함께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의 생각을 그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마음도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말합니다. 너따위는 인간이 아니니까 네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백인만의 세상은 이 지구 상에는 없습니다. 지구 상에는 백인, 흑인, 황인 그리고 수많은 이색 인종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피부 색깔이 최고라고 하는 생각, 즉 자신의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더 낫다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인종따위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만 합니다. 이번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오버부킹으로 인한 승객 폭행 물의 사건은 크게 두 가지 면을 살펴봐야만 합니다. 하나는 오버부킹으로 대변되는 기업 편의주의, 두 번째는 동양인은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백인 우월주의입니다.
    
오버부킹(Over Booking) 즉 초과 예약이란 항공기 좌석 예약자 가운데 탑승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일정한 비율의 좌석에 대해 예약을 더 받는 것입니다. 오버부킹에서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용자 입장에서 공항에서 먼저 탑승수속을 해야 한다라고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법조항을 만든 것은 기업의 이윤에 소비자들의 권리를 침해시킨 것이며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여기서 백인 우월주의가 나온 이유는 유나이티드 항공사에서 오버부킹으로 인한 예약자 초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컴퓨터로 무작위로 나갈 사람을 뽑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양인이 세 명이나 뽑힌 것을 두고 유나이티드 항공사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 - 인종 우월주의로 인한 - 을 뽑아낸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폭행물의 사건은 유나이티드 항공사만의 문제는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버부킹으로 촉발된 기업 우선주의, 동양인을 폭행한 경찰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백인 우월주의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최악의 상황입니다. 유나이티드 항공사는 당연히 무조건적인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 대책, 그리고 보상 및 배상을 해야 할 것이며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기업 우선주의와 인종 차별주의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나이티드 항공사뿐 아니라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노력을 계속 해야만 할 것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님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시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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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에게 있어 성경은 삶의 지표가 됩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석할 수 있어야 하며 명확하고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Exegesis)과 자기 생각을 성경의 내용인양 말하는 것(Eisgesis)이 있습니다.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좋으냐, 어떤 것이 옳으냐라고 하면 백이면 백 모두 석의 즉 성경 말씀을 끄집어 내는 것이 더 옳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끄집어 내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상당히 어려운 과정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 당연히 저를 포함해서 - 성경의 내용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쓰신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상황, 내 생각에 집중해서 주해를 하게 되고 그렇게 하게 됨으로 인해 성경 해석은 망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물론 그들 스스로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다고, 성경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성경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할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 10)
    
사역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따라 매일 살아가야만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가 많이 힘들기에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해석한 내용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설교한 말씀을 가지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의 지표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옳은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따져보지 않고 성경을 해석해버리면 자칫 성경을 왜곡하는 말씀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영어나 다른 나라의 언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구글 번역기와 같은 번역기를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번역기를 너무 맹신하면 그것만으로도 위험합니다. 즉 한 문장, 한 단락 혹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내용을 번역기로 돌렸을 때 그 번역된 글이 원래 내가 썼던 글과 언어만 다를 뿐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틀린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 확인은 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번역기로 돌린 내용을 중요한 서류로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한글 개역개정판, 혹은 개역한글판, 새번역판을 의지하는 이유는 그 본문 자체가 원어 그대로라는 것이 아니라 원어인 헬라어, 히브리어, 그리고 아람어의 말씀을 믿을만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비평하고 다시 보고 개정하여 만들어낸 원문 비평본을 가지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며 번역된 내용조차도 수없이 많은 학자들이 확인하여 틀린 곳을 개정하였던 한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영어 번역본과 비교해서 볼 수도 있으며 또한 가능한 사람들은 히브리어 비평본 - BHS - 이나 헬라어 비평본 - UBS 혹은 NTG - 을 사서 확인하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기독교TV에 나오거나 혹은 유명한 목회자들의 말씀이라고 무조건 맹신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일대일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해석하는 것 또한 내가 해야할 일입니다. 물론 내가 그러한 능력이 없기에 우리는 부지런히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선교단체의 간사들에게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이 정말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한 번은 더 고민하고 한 번은 더 상고해봐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조건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믿어서 우리 자신의 믿음의 행동, 우리 자신의 신앙 생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의 책무 자체를 왜곡시키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  즉 코람데오(Coram Deo)의 신앙 생활은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그리스도, 다른 사람이 선포하는 말씀을 맹신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과 일대일의 삶,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한 번은 더 확인해봐야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없다보면 우리는 어느샌가 하나님 아닌 다른 그 뭔가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길렀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는 노력 또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책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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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윈도우와 맥을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윈도우용 키보드와 맥용 키보드가 따로 있습니다. 심지어 맥용 키보드인 해피해킹은 키보드 배열이 다른 키보드와 상이합니다. 그렇다보니 키보드를 번갈아 사용하는 것 때문에 오타가 생길 때도 있고 실수하여 글의 상당 부분을 삭제시킬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어느 정도 지속이 되다보니 키보드를 통일을 시킬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키보드는 해피해킹과 리얼포스인데 리얼포스를 중고로 내놓고 해피해킹만 사용할까 아니면 그 반대로 할까 고민했던 것입니다.
    
둘 다 상당히 고가이고 이 제품들을 살 때에는 제가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있었을 때였기에 가능한 제 나름대로의 조금은 과소비를 한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력이 안되기에 파는 것도 한 가지 좋은 방책이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두 제품 모두 저에게는 많이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지만 둘 다를 사용할 수 없다면 - 무접점이기에 더욱더 - 하나를 파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생각을 조금은 바꾸게 되었습니다.
    
둘 다 소중한 제품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이유 때문에 둘 다를 계속 가지고 있겠다라고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불편함 때문에 계속 가지고 있기로 한 것입니다. 해피해킹과 리얼포스 그리고 맥과 윈도우를 같이 쓰게 될 때 적어도 글을 쓰는 것 자체에서는 그리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글자가파여 있는 자판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콘트롤, 쉬프트, 커맨드, 알트 그리고 델레트, 펑크션과 같은 특수 키가 있고 없고의 차이, 배열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아무 생각없이 익숙해지면 그대로 키보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맥을 거의 사용하지도 않았고 맥북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비슷한 곳에 대부분의 키가 있었기 때문에 사용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힘든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해피해킹과 리얼포스는 키의배열 자체가 조금은 다르며 심지어 해피해킹은 펑크션 키들 즉 일반 키보드의 가장 위에 있는 키들이 단독으로 없고 키의 조합으로 만들어내야 하기에 생각하지 않으면 고민하지 않으면 실수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아예 글을 쓰지도 못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 볼 수 있는 키보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실수할까봐 한 번 더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는 생각 공장입니다. 그러나 스마트 기기들이 주위에 있으면서 전화번호 하나 기억하는 것 자체를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결국은 머리를 사용하는 것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키보드의 키배열을 실수하면서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게 됨으로 인해서 오히려 생각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생각을 조금은 다른 곳에 하게 되니 글을 쓸 때에도 오히려 막힌다라는 느낌보다는 생각의 틈이 생겼다라는 마음이 더 많아졌습니다.
    
가족에게 말을 하는 것,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멈춰진 시대입니다. 집에서도 대화를 하기보다는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어른들 그리고 어린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곳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는 자신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은 신경 쓰지 않도록 많은 제품들이 만들어지며 그 제품들 때문에 더 사람들은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혼자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됩니다.
  


혼술, 혼밥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그러한 시간들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더 외로워지고 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막혀지고 있는 상황 문제인 것입니다. 편한 것만 찾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아하는 것만 신경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조금은 더 나만의 세계에 빠지지 말고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는 여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내가 해야 하는 것만을 신경 쓰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타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키보드를 하나로 통일하고 맥과 윈도우 키를 통일시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타를 없애기보다는 오히려 생각을 조금 더 투자해서 오타를 줄이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벌려진 생각의 틈 안에 내가 과연 이 글을 왜 쓰는지, 왜 이러한 말을 하는지에 대해서 한 번은 더 생각하면 오히려 오타를 없애는 것보다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ps... 아 물론 너무 키보드에 빠지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두 가지 종류의 키보드 외에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1: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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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양비론이 좋은 선택지는 아닙니다. 양비론을 선택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은 옳고 양쪽 선택은 모두 옳지 않다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비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왕왕 오기는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의 잘못이 눈에 보일 경우 상대 진영의 잘못도 있지만 우리 진영의 잘못도 눈에 보인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변혁은 개혁은 일어나지 않고 진흙탕 싸움만 일어날 뿐입니다.
    
표창원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누드화를 국회에 전시하는데 편의를 봐준 국회의원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사과를 하였고 징계를 받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의견을 과격하게 표현했다라는 것 그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혹자는 표현의 자유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대상이 되는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혐오스럽게 그 작품을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표현의 자유라고 하기에는 생각을 해봐야만 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과거에 그리고 중동에서의 현재에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동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출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불이익을 받는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인정을 한다라고 한다면 별로 상관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폭력적인 행동 폭력적인 표현은 상대에게 같은 수위 혹은 그 이상의 수위의 폭력 혹은 표현을 만들게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표현의 자유로 그러한 표현 혹은 폭력을 다루게 되면 다루게 될 수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표창원 의원이 징계를 받게 된 이유는 상대가 보복할 수 있는 근거, 상대 진영이 이쪽 진영을 비난할 수 있는 근거를 주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표창원 의원이 징계를 받은 이유는 표현의 자유 자체를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에 따른 비난 그에 따른 처벌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표창원 국회의원의 징계를 받는 것 자체에 대해서 표창원 의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일단락이 된 사안입니다. 이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창원 의원과 그 아내의 합성 누드화를 국회 근처에 현수막으로 거치한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은 마치 표창원 의원에 대한 처벌이 당연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일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지지자가 수치심을 느끼게 한 작품에 대해서 처벌을 요구할 수 있는 것처럼 표창원 의원과 그 아내가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거치한 것도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말로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잘못을 했으니 내 잘못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도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잘못을 한 사람은 모두 그 잘못으로 인해서 처벌을 받아야 하며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우리 진영의 행동이라고 해서 잘못을 묵과하거나 정당화 시키려고 하는 행동 혹은 합리화 시키려고 하는 행동이 생기면 생길수록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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