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and Context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과거 1992년 재림 광풍이 불었던 때에 당시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시한부 종말론주의자 한 명의 말이 아직도 마음에 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혹시나 오시면 그 분을 만나뵙고 10월 28일에 오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라고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앙관은 양쪽 모두에 발을 디디고 있다가 하나가 틀리면 다른 하나로 자리를 이동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였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었고 그는 다시 발을 옮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험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믿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죽음 이후를 준비하고 삶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경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믿지 않는 사람들 중 일부는 믿는 그리스도인, 경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권유합니다. 세상의 것을 같이 누리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방법은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19-24)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양자 택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돈을 섬기는 것, 세상의 가치를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함께 갈 수는 없습니다.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둘 다를 모두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우리를 부르셨을 때 우리에게 생명과 사망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세상의 가치, 세상의 판단을 더 먼저 따지고 하나님을 그 다음으로 따져서는 구원을 얻을 수도 없으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사역했을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 율법 주의자들에게 혹 했던 이유는 두 가지 정도 됩니다. 하나는 로마인들은 종족 신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지만 종족을 불문하고 퍼지는 신들에 대해서는 인정해주지 않으며 그러한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황제도 같이 숭배해야만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종족신들을 믿는 사람들도 황제를 숭배해야 하지만 야훼를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러한 특혜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특혜는 비단 팔레스타인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로마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주는 특혜라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1, 12)
      
그렇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하게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유대인이 되는 것을 선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할례를 받기만 한다면 유대인으로서 적을 올리게 되면 고난을 받을 필요 없이 그리스도를 마음껏 섬길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도했던 바나바도 그리고 바울도 유대인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꼼수를 통해서 피해보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에서 시키는 것을 하는 것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영민하게 꾸릴려고 한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율법적으로 즉 제의를 드리고,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 즉 그들은 세상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확신이 없었기에 자신의 몸에 새기는 것으로 그 확신을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정말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인가 확신이 부족하여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확신 꺼리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6-9)
     
방언은 분명히 우리에게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유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과거 미국의 오순절 교단의 일부 사람들은 방언을 받는 것이 구원의 한 증거라고 믿기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에 눈에 보이는 증거 즉 방언을 하는 것으로 그 증거를 삼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은 사람들 즉 방언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증거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방언은 선한 것입니다. 방언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언이 하나님을 믿는 그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방언이 그 근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바로 그 믿음이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수많은 위험과 위협 그리고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한 위험과 위협 그리고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갑옷으로 우리 자신을 둘러싸게 되는데 그러한 갑옷이 가끔은 우리의 숨을 막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저는 인정받은 유대인이라는 감투를 쓰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할례를 통해서 얻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핍박을 피하려 하지말고,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다른 것에서 찾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며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 이끄는 단 하나의 필요충분 조건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세상의 방법, 그 어떤 이단의 방법을 하나님을 믿는 주요 조건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주요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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